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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김세원 Oct 10. 2021

第1章. 떠날 수 없었던 이유(5)

<화산지연리>

“어린 것이… 참 기구하기도 하지.”


무영은 말을 아꼈다. 황성의 감옥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혹독했다. 소년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더 호기심이 생겼는지, 주변에 앉은 죄수들이 몰려들어 다들 한마디씩 던졌다.


“놔둬! 저러다 알아서 곧 꺾일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긴 그래, 여기가 어딘가. 장정으로 들어왔다가 불구가 되어서야 겨우 세상을 다시 구경할 수 있는 지옥이 아니던가!!”


죄수들의 신소리가 앞다투어 무영의 귓전을 때렸다. 무영은 조용히 운기조식을 펼쳤다. 단전의 호흡을 고르며 뇌리를 가다듬었다. 어쨌든 이 선택에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잘한 일이야. 그때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십사 사형은 다시 또 죽었을 테지.’


생각을 정리하며, 무영은 남몰래 돌바닥에 책력을 그렸다. 아내가 일러준 시실리 섬 사람들의 역법이었다. 무언지도 모를 꼬불꼬불한 기호와 숫자를 연이어 써 내려가며, 그는 때를 골랐다.


‘딱 삼 년이다. 삼 년만 이 안에서 버티자.’


아내가, 사랑하는 일런이 호상(胡商) 무리를 이끌고 이 중원 땅을 밟게 될 날.

그리고 자신이 있는 이 장안성 황궁으로 오게 될 날을 말이다.


‘오늘로부터 딱 천 일하고도 95일이 지나면, 난 다시 아내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이 천둥벌거숭이가… 감히!”

“시, 십오 사제! 너 미쳤어?”


십사 사형 무천도 놀랐고 좌중이 일거에 숨을 죽였다. 

무영이 일으킨 파동은 그만큼 어마어마했다. 


황실 무관에게 대들다니, 어린아이가 함부로 벌일 짓이 아니다.


“감히 내 검을 부러뜨리다니!”


두 꼬마를 매섭게 노려보며 황실 무관이 언성을 높였다. 

부러진 칼자루를 거칠게 내동댕이치면서 놈이 또 외쳤다.


“네놈들 모두 살려두지 않겠다!”


“십사 사형, 도망쳐!”


그 와중에 무영이 재빨리 소리 질렀다. 풍등을 안고서 굳어버린 십사 사형에게 어서 몸을 피하라고. 빨리 본당으로 돌아가 사부와 사형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고래고래 외쳤다.


“뭐? 하, 하지만, 무영아!”


주저하는 십사 사형의 모습이 퍽 갑갑했다. 

무영은 더욱 큰 목소리로 재촉했다.


“빨리!”


“이놈들이, 대체 무슨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게냐! 어딜 도망가려는 게야! 내 고이 보내줄 성싶으냐.”


격분한 황실 무관이 무영의 작은 몸을 걷어찼다. 


그러나 이 쥐방울 같은 꼬맹이는 조금도 길을 내주지 않았다. 

가격당하면서도 버티고 또한 맞섰다. 


황실 무관은 격노했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대며, 그는 무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네놈들 모두 모반의 죄로 다스릴 것이니, 참형을 당할 것이란 말이다!”


“흥!”


무영은 요리조리 몸을 날렸다. 한 마리의 미꾸라지와도 같은 모습. 좀처럼 잡히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무영의 모습에 황실 무관은 더욱 분개했다. 


덩달아 놈의 발길질이 곳곳에 내리꽂혔다. 무영은 데굴데굴 굴렀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서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멈추어라!”


바로 그 순간, 가마의 높은 단 위에서 누군가의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 공주마마!”


덩달아 좌중의 낯빛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 이윽고 주변의 신소리를 일거에 닫아건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했다. 다름 아닌 올해로 11세가 된 안락공주 이과아다.


“내, 멈추라고 했느니.”


주변의 얼어붙은 기류 따윈 간단히 무시한 다음, 가마의 주인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재차 한마디 보탰다.


“호송 무관은 이만 물러서거라. 어린 백성의 몸이 많이 상하지 않았더냐.”


“마마, 하오나 저놈은…!”


황실 무관이 작게 항의했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꽃가마의 주인이 가마의 입구에 길게 드리운 주렴을 걷고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리도 황송할 때가…!”


일동은 모두 숨을 죽였다. 아닌 게 아니라 눈앞에 선 귀인은 지엄한 이 나라 지존께서 총애하는 따님이시다. 어찌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을까.


“아이고야, 공주마마…!”


“안락공주 마마, 천세천세, 천천세!”


마을 사람들은 물론, 호송하던 무리도 다들 무릎을 꿇고서 정중히 예를 갖췄다. 오직 단 한 사람만 빼고.


“공주마마, 천세천세, 천천세!”


“…….”


그는 바로 무영이었다.


“….”


주변에서 보면 참 별나 보이기는 했다. 

꼬부랑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 모두 머리를 조아리는 가운데, 유독 이 조그마한 꼬마만 당당했다. 


안락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공주가 한마디 했다.


“꼬마야, 너는 이 내가 무섭지 않은 게냐?”


무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안락공주는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작고 귀여운 여자애였다. 


“….”


무서울 게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고개를 들어 마주 선 상대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는 소년의 당찬 시선을 느낀 걸까. 

안락공주의 눈매가 묘하게 구겨졌다.


“어찌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이야?”


그녀의 눈빛은 성난 까치고양이의 것과 참 닮아 있다. 어렴풋이 드는 잡념을 정리하며, 무영은 조용히 부연했다.


“그게, 무림의 예법과 속세의 예법이 또 다른지라, 함부로 따를 수 없음을 부디 용서하시지요.”


“…건방지구나.”


무영이 조심조심 내놓은 답변에 푸른 치맛자락을 움켜쥔 안락공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에도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뭐, 무림의 예법? 하!”


한편, 이 와중에 무영은 공주가 입은 치마를 보고 있었다.

그 화려함이 눈동자가 어지러울 만큼 이채로운 빛깔로 빛났다.


치맛단 위에 새와 꽃을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 더욱 화려하고 풍성한 느낌은 덤이다. 그건 솔직히 예뻤다. 어디까지나 공주가 아니고 치마가 더 예뻤다. 


비싼 건 역시 비싼 값을 한다는 생각도 모락모락 든다. 

혹 사랑하는 일런이 지금 당장 곁에 있다면, 한 번쯤은 저런 치마를 선물해도 참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마 아내도 참 좋아하지 않을까. 무영은 나직히 웃었다.


“동자는 다시 내 물음에 답하라.”


바로 그 순간, 안락공주가 재차 언성을 높였다.


“내 다시 묻겠다. 너는 어찌 감히 황실 행렬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냐? 네 정녕 모반을 꾀하려 했던 것이냐?”


제법 담담한 표정으로 안락공주를 마주 응시하며, 무영이 답했다.


“미천한 자, 어찌 대역의 죄를 감히 마음에 품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나라에 고할 억울한 사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뭐래…….’


무영은 줄레줄레 이어지는 이 뻔하고 흔한 전개가 족히 어이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이방인 화동이 푸른 눈동자를 느릿느릿 깜박이며 이렇게 한마디 보탰다.


“불초 소인, 공주마마께 감히 아뢰옵니다. 이 백성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흠, 화동은 고개를 들라.”


“예,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년의 변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안락공주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너의 바른 성품,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닌 듯하구나”


’쟤, 생각보다 우리 말 되게 잘 하네....’


그 와중에 무영은 이방인 소년이 퍽 신기했다. 

아무리 봐도 아이는 최소 색목인으로 보였다. 


그 심히 이국적인 외양으로 중원어를 저리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니! 어쩐지 기억 속 누군가와 닮아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저 색목인 소년의 모습이 무영은 참 생경하고도 낯이 익었다.


‘나, 저 애를 어디서 봤던가?’


무영이 고개를 갸웃할 즈음, 까치고양이 같이 새침한 눈을 빤히 뜨며 안락공주가 외쳤다.


“어린 백성은 다시 답하도록 해라. 나라에 고할 억울한 사정은 정녕 하나도 없는 것이야?”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저 공주마마, 이 상황을 고분고분 넘어갈 만큼 착한 사람은 아닌 거 같았다. 무영의 촉은 정확했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 행차를 가로막고, 이를 꾸짖는 황실 무관에게 패악을 저질렀느냐?”


안락공주의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물론 무영은 여전히 십사 사형이 빠르게 자리를 피해 달아난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 이 자리에서 피할 일은, 최소 목이 달아나는 참상까지는 이르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렇다면 이 다음은 어찌 할 텐가? 무영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너, 어찌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 것이야? 내 장도로 친히 네 입을 도려내야 말을 제대로 뱉을 것이야?”


그런 소년을 향해, 미소 아래 방향이 분명한 비수를 시리게 가득 품고서 공주가 말했다. 


“이실직고하면, 내 친히 너의 죄를 사해 줄 것이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공주마마.”


이에 무영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재차 부연했다.


“소인의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형제가 정월 풍등을 주우려 했고, 와중에 일이 커진 것뿐입니다. 공주께 고할 말은, 더는 없습니다.”


“그래… 이 소동이 모두 한갓 풍등 때문에 벌어졌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것 참 괴이하구나. 재밌어. 흥미롭구나.”


즐겁다는 듯, 무영을 응시하는 안락공주의 눈매가 묘하게 호선을 그렸다. 무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사실대로 고했으니, 공주께선 이제 약속대로 소인의 죄를 사해주시렵니까?”


“글쎄…?”


물론 그럴 리가 없을 터다. 지극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공주를 응시하는 무영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피식 웃으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천자의 이름을 가슴에 품은 귀인께서, 어찌 이리도 인의에 박하시단 말입니까?”


“아, 아니 이 꼬마놈이 감히!”


놀란 황실 무관이 펄쩍 뛰었지만, 안락공주는 태연했다.


“호송 무관은 그쯤 하라. 저 동자의 말이 퍽 재미있지 아니한가?”


“귀엽게 봐주시니 미력한 소인으로선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만.”


공주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맞상대하는 무영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저 공주 마마가 내보일 수는 훤히 꿰뚫은 그였다.


“그러면 공주께서는, 인의에 따라 불초 소인의 처분을 어찌 내리실 요량이십니까?”


그런 무영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안락공주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왜, 내 당장 장도로 네놈의 사지육신을 친히 도려내 주랴?”


“….”


일견 표독스럽다고 해도 좋을까. 입가에 걸린 비릿한 조소가 그 증거였다. 

저 공주의 혀와 입술은 분명 아주 무시무시한 흉기였다. 단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무영조차도 대번에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훤했다.


“과아, 너는 말을 삼가도록 해라. 저 동자는 그저 어린 백성이 아니냐.”


그 순간, 뒤따르던 또 다른 가마의 주렴 너머로 누군가 한마디 했다. 차분하면서도 품위 있는 목소리로, 그녀는 공주의 어린 행태를 꾸짖었다.


“과아, 밤이 늦었다. 속히 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니, 채비하거라.”


“바르게 처결하기 위해 만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일찍이 천후께서 이르시던 말이거늘, 고모님께서는 어찌 소녀의 뜻을 꺾고자 하십니까?”


“어허. 너는 그쯤 하래두, 내 이르지 않더냐.”


“하오나, 고모님.”


안락공주는 상대의 조곤조곤한 설득이 못마땅한 듯 입을 비쭉였다. 그것도 잠시, 이내 입가에 완연한 미소를 띠고서 한마디 보탰다.


“고모님, 소녀에게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컨대, 들어 주소서.”


“…….”


“마침 며칠 전에 소녀가 부리던 격구 노예 하나가 완전히 못 쓰게 되었으니, 대신 저 아이를 데려가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쓸모가 족히 있을 것이옵니다, 고모님.”


무영은 숨을 죽였다.


“얘야, 과아.”


그러자 주렴 너머의 상대가 긴 침묵을 끊고서 한마디 보탰다.


“저 동자의 기골이 흡사 고양이 목에 단 방울만큼 조그맣고 심히 볼품이 없는 형상인바, 반대로 격구란 매우 혹독한 것이니, 네 격구 노예로는 적합지 않느니라.”


“하오나, 고모님. 소녀의 생각은 다르옵니다.”


안락공주가 재차 당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이제 어떤 수를 쓸 것인지 분명히 깨달은 무영 역시, 조용히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동자의 외견이 비록 작고 비루하나, 황실 무사와 겨룰 담력이 있고 그 무예가 출중하니, 분명 소녀를 위해 초왕 융기의 무사들을 능히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당장 사막으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땅히 아내를 다시 만날 곳은 그녀가 시실리 왕국의 사신으로 들어갈 황궁 뿐이다. 생각을 마친 무영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것으로, 나는 장안성 황거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길이 노예의 길이라 할지언저!




                                                                                            - 第1章. 완(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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