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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김세원 Oct 10. 2021

第2章. 구중궁궐의 가시 (1)

<화산지연리>

챙! 챙!

무영은 손에 든 나무 막대기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제 키만큼 커다랬지만 괘의치 않고 싸웠다. 중심 선을 마주하고 선 꺽다리 녀석도 이런 무영의 반격에 놀란 눈치다.


“쥐방울 꼬마, 또 네놈이지. 참말 제법이구나!”


미간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꺽다리 놈이 비웃음을 흘렸다.


“어디 이 공격도 막을 수 있을 터냐!”

“···얼마든지!”


무영은 적을 향해 씩 웃었다. 나무 막대기를 쥔 손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었다. 적이 제 막대기를 높이 들고 내려찍으려는 그때, 소년의 신형이 그보다 더 빨리 허공을 갈랐다.


챙!

덩치만 컸지 손 쉬운 먹잇감이었다. 

놈이 휘두른 궤적은 뻔히 보이는 장난밖에 되지 않았다. 


그 호선을 작은 발로 빠르게 딛은 무영이 몸을 날렸다. 

뜻밖의 보법에 당황한 꺽다리 녀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황한 것이다. 그러자 날다람쥐처럼 몸을 던진 무영이 이어 그대로 낙하하며 빠르게 공을 메다 쳤다.


“으라차!”


공과 더불어 소년의 작은 신형이 적의 가랑이 사이로 미끄러졌다.


“이런 제기랄!’


순식간에 벌어진 일. 

놀란 적병들이 재차 막대기를 쥐고서 덤벼들었다.


“읏차!”


무영은 놈들을 하나 둘 순식간에 제쳐 넘겼다.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못했다.


“됐어, 그대로 넣어버렷!”


잔뜩 신난 안락공주의 괴성이 귀빈석에서 얼핏 들렸다. 그 반갑지도 않은 목소리를 응원처럼 뒤로 하고서, 전면에 난 와아(窩兒)의 작은 구멍을 향해 힘껏 공을 차 넣었다.


달려드는 문지기 녀석이 채 막기도 전에 쾅! 


“하아압!’


직격으로 메다꽂았다. 또 멋지게 마무리했다. 이것으로 무영은 또 하나의 승리를 거뒀다. 정확히는 안락공주 이과아를 위한 승리가 되겠지만.


뭐, 어쨌든 이것으로 하나쯤 성가신 일을 던 셈이다.


“와아아! 또 이겼어, 무영이 또 이겼다구!”


화려하게 치장한 소녀가 귀빈석에서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그녀는 누가 봐도 황상의 고명딸인 안락공주 이과아다. 


오늘도 제 사촌 오라비뻘 되는 초왕 융기와 벌인 격구 대결, 그 시작과 결론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노상 있는 황족들의 유희였다. 


본래 같으면 초왕이 먼저 제의를 할 일이고 승리 역시 초왕의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놀랍게도, 안락공주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 것이다.


“어휴···. 또 저 땅꼬마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기막혔다. 초왕 융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대체 멍청한 과아 따위가 저런 인재를 어디서 구해 왔단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매일같이 멍청하다고 멸시하던 안락공주 이과아다. 철없는 계집애가 할 줄 아는 짓이라곤 갖가지 사치를 부리는 일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저 어린 것이 제 어미 황후 위씨와 더불어 하는 짓이 뻔했다. 두 모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라 곳간을 탕진하는데도 황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황망한 상황에서 초왕 융기가 부왕과 더불어 꾸준히 간언을 해도 아둔한 황상에게는 씨알조차 들어먹지 않는다. 오히려 위황후 일파의 눈 밖에 난 가시가 될 뿐.


[너, 초왕 융기는 듣거라!]


이걸로 끝인가. 그렇게 위후 일파의 무고에 목숨을 잃을 뻔도 한 초왕이다. 다행히 조카인 초왕의 충심을 곱게 보는 황상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허허… 이놈들아, 이거 대체 몇 번째인지…!”

“망극하옵니다, 왕야!”


결국 그가 뜬금없이 안락공주와 격구 대결에 심취한 듯 행동한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였다.


따르던 충신들이 사치를 멀리 하라 간했지만, 초왕은 간단히 무시했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해야만 했다. 저 위황후 일파의 속셈을 미리 파악하려면, 역시 이것 뿐이다.


따라서 저 어리석은 안락공주 이과아는, 그저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사촌지간의 정 따위, 있을 턱이 없다.


“와아! 내가 이겼어, 또 이겼다구!”

“끄응···.”


저 멍청한 과아 따위는 본디 자신의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럴 줄로만 알았다. 


젠장! 

그러나 초왕 융기의 굳은 믿음은 오늘로 또 깨졌다. 

이걸로 다시 또 다섯 번째다. 


기막히게도 어디서 구해왔는지, 안락공주의 오합지졸 노예 군단에 추가된 쪼그만 땅꼬마 한 마리가 제 계획을 망쳤다. 뜻밖에 만난 호적수. 초왕으로선 어이가 털려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왜 너희 초왕부의 놈들은 저런 재인을 구해오지 못하는 것이야! 으휴···.”

“송구하옵니다, 왕야!”


은자가 아까운 것이 아니다. 

그저 저 멍청한 과아 따위가 문제다. 


저 아둔한 것이 신나 뛰노는 모습을 연거푸 목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역시 최악이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초왕 융기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안락공주 이 조그만 것이 어느덧 기세등등해져서 다시 또 성화를 부렸다. 약속한 대로 신라국이 진상한 공작선과 보물 옥피리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이것으로 다섯 번째요, 왕야! 허니 군말 말고 어서 소녀와의 약조를 이행하세요!”


망할 땅꼬마. 작달막한 키만큼이나 포악한 성정은 꼭 제 어미 위후를 빼닮았다. 왜 큰아버지인 황상께서는 저런 흉악한 계집애를 애지중지하신단 말인가! 


기막힌 마음에 초왕 융기는 입맛이 썼다. 

어쨌든 과아 따위에게 다섯 번이나 지고 말았으니 자신도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허허··· 공주, 공주께서 지금 약조라 하시었소?”


“그래요! 설마 왕야께서는 그새 소녀와의 약속을 잊어버리셨단 말입니까?”


물론 잊어버릴 리가 없다. 

당연히 자신이 이길 줄 알고 주겠다 한 것이었으니. 


하지만 방심이 너무 과했다. 

저 어리석은 과아 따위에게 또 분수에 맞지 않는 과한 선물을 안겨 주게 생겼다. 


가져왔다고 좋아하던 일이 엊그제 같더니만... 

초왕은 어색하게 허허 웃으며 짐짓 뒷짐을 졌다.


“약속대로 어서 소녀의 공작선과 만파식적을 돌려 주시어요!”


그런 초왕을 향해 뿔난 까치고양이처럼 잔뜩 성질을 내며 안락공주가 잔소리를 했다.


“어서요!”


“고, 공주 마마. 부디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와중에 공주를 모시던 상선들이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 진땀을 뺐다. 아무리 황상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고명딸이라 해도 상대는 초왕 이융기다. 


엄연히 황실의 친척이자 마찬가지로 그 아비와 더불어 황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자. 그런 작자의 심기를 건들면 또 무슨 풍파가 이 황실에 미치게 될 것인지! 


이 늙은 여우 두 마리로서는 능히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왕야! 어찌 소녀의 청에 답을 하지 아니하시는 것이옵니까?”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안락공주 이과아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정녕 제 보물 두 가지를 돌려받겠다는 일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공주의 이러한 뜻을 직시 했는지, 초왕 융기가 껄껄 웃으며 문득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내 어찌 공주의 청을 듣지 아니하겠소. 공작선과 만파식적이라, 신라국에서 온 옥피리와 깃부채를 내어 달라는 말씀이 아니시온지. 이 사람 잘 듣고 있었소이다.”


“잘 듣고 계신 분께서 어찌 그리도 능청맞게 모르쇠를 하십니까?”


안락공주의 성난 앵둣빛 입술을 넌지시 응시하며, 초왕이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허허 모르쇠라니요. 그저 이 사람, 역시 공주께 한 가지 청을 드릴 일이 있어···.”

“하! 청이라고요?”


초왕 융기의 말을 들은 안락공주의 까치고양이 같은 눈매가 일순 파르르 떨렸다. 하긴 공주의 어린 눈에도 상대의 태도는 적잖이 수상쩍었다. 문제를 직감한 안락공주는 재차 성을 냈다.


“왕야께선 잔꾀 부릴 생각 마시고 소녀와의 약조를 어서 지키시어요!”


“허허, 공주. 우리 공주께서 그새 성질이 많이 급해지셨소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말을 들으면, 공주께서도 생각이 조금 달라지실 거외다.”


안락공주 이과아가 잔뜩 성을 내며 폴짝폴짝 뛰자, 능글맞게 조소를 흘리던 것도 잠시, 자질구레한 언사는 모두 생략하고서 초왕 융기가 조용히 운을 뗐다.


“마침 공주께서 부리는 노예들의 몸짓이 일전의 오합지졸들과는 조금 달라진 듯하여, 이 사람도 격구 구경하는 재미가 새로 생기던 차였소.”


“뭐라고요?”


“아! 이건 절대 칭찬이외다. 암요,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을 상대하는 것보단 재미가 있지.”


“야, 초왕! 너 진짜 죽을래?”


능구렁이와도 같은 상대의 언사. 안락공주 이과아는 기분이 족히 상했다. 거기다 저 초왕 이융기 녀석은 이 꼬마 공주님의 심기 따위는 딱히 배려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놈이 다시 말했다.


“공주께서 어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때마침 곧 전창날 아니요? 길일이 코앞에 다다랐으니, 중한 일 또한 그때 가서 논하는 것이 상례.”


혀에 기름칠이라도 잔뜩 했는지 초왕 융기의 입에서 순식간에 갖가지 고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창날인지 뭔지 알 게 뭐야, 삽시간에 쏟아지는 어려운 단어들의 향연에 안락공주는 아주 조금 기가 죽었다.


‘이융기, 이 우라질 놈을 내 언젠가 반드시 주리를 들고 것이야!’


역시 아무리 깨알 같은 노력으로 학문에 전념한다 한들 소용없다. 

역시 초왕 이융기는 그녀보다 여러모로 한 수 위였다! 


공주로선 그저 속으로 이런저런 저주만 퍼부을 뿐이다. 황실이란 그런 곳이다. 뭔 소린지 모를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줄 알아야 진짜 어른이라고 인정받으니.


“···하오면, 공주 마마.”


쨌든, 잔뜩 뿔이 난 안락공주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초왕 이융기가 드디어 한마디 했다.


“본왕과 다시 새로 약조하시렵니까?” 


“하! 만약 소녀가 이기면, 그때 가서는 또 어찌하실 것인지?”


절대 이 능구렁이 말을 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락공주가 떠오른 최선의 비책은 오직 그뿐이다. 


단순히 어미인 위후의 충고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쨌든 상대는 저 초왕 이융기다. 공연히 엮여서 좋을 일은 만에 하나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안락공주였다.


“약조대로, 그때는 본왕의 무사들을 공주께 모두 드리리다. 아 물론, 공작선과 만파식적도 같이!”


“그게 정말이시옵니까?”


하지만 이어진 초왕의 제안은 아직 어린 그녀가 무시하기엔 너무나 달콤한 것이었다.


“아니 뭐, 공주께서 윤허해 주신다면야 어디 본왕의 노예 무사 따위가 대수겠소. 허허허.”


“흠….”


남몰래 어림셈이라도 하는 듯, 안락공주는 말을 잃었다. 그런 상꼬맹이 공주를 붙들고서 초왕이 재차 능수능란하게 꾐을 늘어놓았다.


“혹시나 이번 내기에서 지더라도 공주께서는 잃으실 것이 없소이다, 아시지 않소?”


“그거야….”


“공주께서는 그저, 내기에서 지더라도 제일 어린 노예 무사 한 명만 본왕에게 내어 주시면 되는 것이오. 이 정도면 거저 드린 조건이외다. 아무리 봐도 본왕이 손해를 보는 격이 아니외까?”


초왕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것도 잠시, 안락공주가 까치고양이처럼 치켜 뜬 눈을 제법 영민하게 반짝였다. 이윽고 그녀가 제 사촌 오라비 되는 초왕 이융기를 향해 넌지시 한마디 툭 던졌다.


“…하지만, 왕야께서 약조를 지키실 것이란 사실을 소녀가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약아 빠진 꼬맹이다. 생각을 마친 초왕 융기가 가늘게 눈을 뜨고서 곧바로 대꾸했다.


“허허 공주, 지금 본왕께 오늘 약조에 대한 증표를 달라는 말씀이시온지?”


“그렇습니다!”


“하오면, 공주께서는 본왕의 제안에 동의하신 것인지?”


“뭐! 그렇다고 해 둘까요?”


능구렁이 같은 초왕의 면전에 대고 상큼하게 웃어 보이며, 안락공주 이과아가 이렇게 확답했다.


“어차피, 그 내기에서 소녀가 지는 일 따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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