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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김세원 Oct 10. 2021

第2章. 구중궁궐의 가시(2)

<화산지연리>

“무영, 깼어요?”


눈을 떴을 때는, 모든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그립고도 달콤한 꿈이다.


꿈, 뜬금없이 탁 트인 시야로 펼쳐진 아내의 형상은 분명 꿈이었다. 

주변에 보이는 익숙한 집안의 집기들도 역시 모두 허상일 것이다. 


솔직히 그렇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폐부를 찌르던 창검의 고통이며 그 어떠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미심쩍었다.


무영은 숨을 죽였다. 

그저 말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그 모습은 흡사 집주인이 아닌 손님의 태도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다시 봐도 주위의 모든 사물이 역시 익숙한 집의 모습이다. 마루를 밟을 때마다 발바닥을 간질이는 보드라운 양탄자의 촉감도 사뭇 낯익었다. 


“무영!”


자신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 보이는 아내의 등 뒤로 부서지는 햇살의 장밋빛 역시 익숙했다.


‘아마도 저건…’


자신이 출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선물했던 대진국산 채색유리창의 빛이 틀림없다. 생각했던 대로 아내의 우윳빛 피부와 퍽 잘 어울리는 색이다. 


생각을 마친 무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눈동자가 걸린 곳을 보면, 역시 사랑하는 아내 일런이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이런 무영의 태도가 퍽 재미있어 보였는지, 아내가 그를 응시하며 슬그머니 눈웃음을 흘렸다. 초승달 모양으로 팽팽하게 휘어진 두 금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 

무영은 눈을 비볐다. 눈앞에 선 연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꿈이 아닌 걸까?’


그 순간, 한 줄기 헛된 희망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가련하게도 그게 무영의 본심이었다. 믿고 싶었다. 자신의 생환을, 그리고 아내와의 재회를.


“이리 와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무영의 손을 비단처럼 보드라운 섬섬옥수로 잡아 이끌며, 아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슴에 폭 안기는 그녀의 가녀린 온기를 느릿느릿 만끽하며, 무영은 조용히 답했다.


“…그러게, 뭘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째서일까. 별안간 눈물이 났다. 

아내의 달콤한 체향이 코끝에 감긴 순간, 그동안의 그리움이 비가 되어 흘렀다. 


무영은 그녀의 작고 둥근 어깨에 조용히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이렇게 말을 보탰다.


“당신이 해주는 거라면 난 뭐든 좋아.”


“어머, 정말요?”


그러자 품속의 아내가 가볍게 웃었다. 

흡사 선녀가 옥쟁반에 이슬을 떨어뜨려 짓는다는 천상의 노랫소리가 바로 이와 같을까. 그 미소를 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영은 깊이 감사했다. 


그래서 더욱 기쁘게 미소 지었다.


그런 그를 마주 따스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아내가 말했다.


“음, 오늘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훈둔(餛飩)을 좀 삶으려고요.”


“뭐, 훈둔을?”


의아해하는 무영을 제법 귀여운 얼굴로 쳐다보며, 아내가 속삭였다.


“그럼요~ 돼지고기를 잘 다듬어서, 얇게 밀어낸 밀가루 피 안에 가둬 모양을 빚은 다음 삶아 내면 되잖아요?”


“런,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되묻자, 재미있다는 듯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화답했다.


“어머, 당연하죠!”


선녀의 노래처럼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잔잔하게 흘렀다. 얼핏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는 듯한 모습, 이윽고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요리인 걸!”


“아…….”


무영은 말을 잃었다.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 들불같이 밀려드는 주저가 그를 만류했다.


‘연무영, 이 한심한 놈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딱 그 뿐이다. 

무영은 직감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고향 요리에 대해 지저귀는 그녀의 고운 낯을 마주 대하는 순간.


‘이 역시, 또 하나의 일장춘몽(一場春夢)인 것을!’


꿈. 그것은 참으로 달콤하고도 잔인한 마지막 꿈이었다.


‘그래, 나는 결국 죽고 말았던 게다.’


생각이 닿은 순간, 무영의 고동색 눈동자가 조금씩 슬픔으로 흐려졌다. 


그렇지만 그는 좀처럼 돌아서지 못했다. 

꿈이란 것을,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도 눈앞에 보이는 저 허깨비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영영 붙들고 싶었다. 

시야에 선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을 이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은 자식… 일런이, 내게 훈둔을 해줄 리가 없잖아.’


기막힌 착각이었다. 무영은 쓰게 웃었다. 

눈으로는 비통한 슬픔의 비를 뿌리며, 그는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저 여인과 함께 건너온 색목인의 세계.

그는 이 이세계의 규율과 풍습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잘 알았다. 

그들에게 금기시되는 행위가 무엇인지도. 


대체 왜 자신이 좋아하던 훈둔 요리를 그 긴 세월 동안 먹지 못했는지 역시, 무영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내는 회교도(回敎徒)였다. 


그렇기에 그녀와 함께 산 세월 동안, 무영의 식탁에서는 돼지고기도, 비계도, 껍데기는 물론 그 어떠한 요리도 올라오지 않았다. 다진 돼지고기를 얇은 밀가루 피에 싸서 삶아 낸 훈둔, 그 요리를 먹어볼 일도 당연히 없었다.


대신 양고기로 빚은 이세계의 동그란 떡만 먹을 수 있었을 뿐.


무영은 아내가 살아온 세계의 규율을 존중했다. 

돼지고기 대신 먹어야만 했던 양고기의 누린내는 양념 없이는 상당히 익숙해지기 힘든 맛이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쨌든 저 여자와 함께 고향을 등지기로 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기도 했으니까.


쨍그랑!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잔혹한 허상이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영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눈앞에 섰던 아내가, 그리운 집의 부엌이, 익숙했던 주변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또 한 점의 모래바람이 되어 사라지는 그 곁에 물끄러미 선 채로.


입안에 맴돌던 마지막 인사말 역시, 뺨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과 더불어 부질없는 메아리가 되어 남았다.


‘잘 있어, 일런.’


“….”


다시 눈을 떴을 때, 무영은 황실의 감옥 안에 돌아와 있었다. 


바깥의 중정에선 그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무리에 끼지 않았다. 대신 저 혼자 쓰는 독방에 틀어박힌 채 멍하니 누워 있었다.


“하….”


무영은 한숨을 쉬었다. 

저 천장의 텅 빈 돌쩌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해야 좋을까?

아무리 봐도 아내의 얼굴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내 아내를,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올해로 열 일곱인 무영은 이곳에서 꼬박 두 번의 원소절을 났다. 


처음 붙들려왔을 때 보낸 첫 번째 정월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화산의 사부와 형제들이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소식조차 들을 수 없는 상황. 그렇지만 혼자서라도 수련을 계속해야만 했다.


<낙매분분!>


우렁찬 함성소리. 눈을 감을 때마다 태화산의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시야를 타고 내렸다. 그 연분홍빛 고운 꽃잎이 비가 되어 무수히 쏟아졌다. 


생생한 기억. 

자신의 작은 육신은 아직도 이 장안의 감옥에 있지만, 정신만큼은 여전히 화산의 형제들 곁이었다. 새삼스럽게도 그 당연한 사실을 무영은 매일매일 다시 되새겼다. 


그리곤 다시 또 혼자만의 수련에 몰두했다.


“후욱, 후욱-”


갇힌 몸으로 할 수 있는 짓이라곤 그저 혼자 수련을 이어가는 일 뿐. 홀로 버티라면 아마도 영영 이 아귀지옥에서 살아나갈 수 없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의 무영이 회귀자라는 사실이었다. 흡사 그림자처럼, 회귀 전의 오랜 기억이 무영에게 좋은 나침반이 되었다. 


기억을 반추하며, 무영은 자신이 마땅히 터득했어야 할 경지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렇게 다시 맞이한 열 일곱 살,

과거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공력이 무영의 전신에 용솟음쳤다.


천장에 다리만 걸치고서 거꾸로 매달려 걷는 일도 무영이 이젠 심심하면 하는 놀이에 불과했다. 회귀 전에는 공을 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었던 몸짓이, 지금은 흔한 취미가 되었다. 


그 사실이 사무치도록 분명해지자, 무영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


보란 듯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생각에 잠겼다. 그런 무영을 감옥의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직 단 한 사람만 빼고.


“무영!”


겁이 없다면 겁이 없고, 철이 없다면 철이 없다고 해도 좋다.

그는 무영이 감옥에서 다시 만난 색목인 친구 사나였다.


“무영! 어디 있어, 어디야?”


정확히는 회귀 전, 아내가 붙여준 무영의 하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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