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지연리>
“무영! 무영, 여기 있느냐?”
옥사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친구인 사나다. 무영은 하던 훈련을 멈추었다. 대신 아무렇지 않은 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너, 예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다들 기뻐하는 소리가 들리질 않아?”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형상이 무영의 곁에 섰다. 회귀 전에도 늘 함께 지냈던 친우, 온갖 생사고락을 같이 넘나들었던 그 친구 사나가 바로 제 앞에 서 있었다.
“사나….”
무영은 조용히 눈앞에 선 친우를 응시했다.
친구의 어린 모습이 역시 낯설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그 표정과 음성조차도, 기억 속의 것과 어쩐지 미묘하게 달랐다. 하긴 회귀로 지나온 세월만 수십 년. 이곳이 영 다른 세계라는 증거다.
“하하….”
무영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노예가 나아가 놈들을 막겠습니다. 주인 나으리, 마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뒤따라 회귀 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들불같이 떠올랐다.
비참했던 제 죽음을 떠올리니 어쩐지 추웠다.
두려움일지 무엇인지 정체도 모를 혹한에 무영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덩달아 그 시린 과거의 불길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나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죽고 싶지 않… 아.]
[안 됩니다, 나으리!]
생각이 치밀 때마다 입술 안의 생기가 절로 말라붙었다. 무영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차디차게 굳어버린 그의 낯이 이상하다는 듯, 눈앞에 선 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영…. 너 왜 그래?”
“….”
무영이 반응하지 않고서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자, 이번에는 코앞에 대고 손을 흔든다.
“응? 뭐야, 또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드렁해져 있어?”
눈에 익지 않은 그 고운 낯이 흡사 허깨비는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마주 선 아이는 분명 제 오랜 친구이자 전우인 ‘사나’였다. 그가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섰다. 새빨간 머리칼에 사파이어빛 파란 눈동자, 그리고 눈처럼 하얀 피부가 참으로 이채로웠다.
소년의 그 모습은 흡사 파사국에서 난다는 신비의 과일, 석류를 희고 가는 사막의 모래에 알알이 흐트러트린 듯했다.
[먹어, 종일 굶었잖아.]
어린 시절의 사나를 처음 만난 날은, 무영이 황실 감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마도 꼭 닷새가 지난 무렵이었을까. 그 이방인 아이가 뜬금없이 자신에게 식은 밥덩이를 내밀었다. 제 몫으로 간수 졸개들에게 받은 것이 분명할 것.
그때는 사나인 줄도 몰랐다.
서로 통성명을 하기 전이었으니까.
마지막 식량을 건넨 그 때 묻은 손과 팔이 참 하얗고도 앙상했다. 그래서 솔직히 기가 막혔다. 저런 샌님에까지 동정을 받을 만큼 또 약해졌는가 싶어서.
[뭐야.]
어이가 없었던 당시의 무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서 더욱 날이 선 목소리로 받아 쳤다.
[…동정하는 거야?]
상대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
[네 동정 따윈 필요 없어.]
재차 쏟아진 냉소에도 이방인 소년의 표정은 변함없이 따스했다.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종일 굶어서 배고플 거 아냐, 난 괜찮으니 어서 먹어.]
[….]
무영은 말을 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이방인 소년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참 낯이 설면서도 익숙했다.
무영은 아이가 건넨 주먹밥을 먹었다.
화산의 제자로서, 하물며 회귀까지 한 자신이 정체도 모를 이방인에 의지하다니 참 기막힐 노릇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헤헤….]
이런 무영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상대가 문득, 다시 무영을 보며 웃었다.
[잘 먹네. 잘 먹어서 다행이다.]
[….]
물론 마주한 색목인 아이의 시선이 아주 따스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 것 그대로의 풋풋함, 그 산뜻하면서도 청아한 빛이 색목인 소년의 고운 낯에는 완연했다.
흡사 봄날의 햇살처럼,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 이방인 아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걸까?
생각만으로도 기막힌 인연. 무영은 쓰게 웃었다.
“…사나.”
상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축하연이야, 늘 있는 일이잖아. 너야말로 대체 왜 그렇게 잔뜩 들떠 있어?”
천장에서 한 번 가볍게 회전을 한 다음, 무영은 감옥의 돌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리곤 눈이 둥그래진 친구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러자 친구 사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을 받았다.
“…역시, 네 하는 모양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깐!”
멋쩍게 미소 짓는 친구를 향해 키득키득 웃으며, 무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왜 인마, 이번에는 또 무슨 비유를 하려구?”
이야기를 처음 나눴을 때부터 직감한 사실이었지만, 사나는 장안성 황실 감옥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유랑 생활을 한 듯싶었다.
하긴 회귀 전에도 사나는 아내의 호위무사로 오랫동안 상단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사막과 중원, 그리고 다시 지중해를 떠돌며 보고 들은 풍문도 아마 상당하겠지. 덕분에 사나는 평범한 중원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가끔 뜬금없다 싶을 이야기도 곧잘 꺼냈다.
“아니아니, 그러니까… 무영이 넌 이를테면 박쥐 같아!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박쥐!”
“허! 이 새끼가 진짜- 하하하!”
물론 그 표현이 욕이 아니라고 이해해주는 친구 역시 이 감옥 안에서는 무영 뿐이었다. 그건 악의 하나 없는 사나의 행태를 무영이 친구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쥐방울에서 진일보한 표현 거 참 되게 고맙다, 친구야.”
“헤헤… 그렇게 말해주니 이거 또 부끄러운데~”
수줍게 웃는 친구를 조용히 응시하며, 무영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런이 이끄는 상단이 장안성에 올 날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기이한 문제는 바로 지금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사나의 존재였다.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사나는 아내의 가문에서 대대로 일하던 하인이자 호위무사요, 시동이라고 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그녀의 무리와 떨어져 이곳 장안성 감옥에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일까?
‘역시, 그렇다는 건 내 아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당장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가장 두려운 숙적이 벌써 움직여 버리기 시작한 걸지도 몰랐다.
‘마교주, 천마대제 이연.’
그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무영은 숨 죽여 이를 갈았다.
‘분명히 이건 풍문으로만 듣던 마교가 진짜 움직였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
사나는 좀처럼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지만, 그가 간간히 악몽을 꾸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노라면 역시 이 추측밖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써 시작된 것이 분명해.’
무영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조만간 당도할 아내와의 재회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 못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친구가 잠결에 하던 이야기를 들으면, 비극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나는 항상 잠꼬대로 자염에 둘러싸인 바레모 성을 이야기했으며, 어서 아기씨를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그리고 무영은 그 이야기가 회귀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든 이 장안성에서 일런의 안전을 확인해야 해.’
앞으로 취해야 할 전략도 이것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어쨌든 아내가 살아 있다면, 상단의 단주이자 사신으로서 장안성에 입성할 테다.
‘사신으로 온다면, 분명히 황상을 알현할 것이고, 마땅히 축하연이 있을 것이다.’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순간은, 분명 그 축하연 자리 뿐.
연회에는 으레 노예들을 시켜 격구 경기를 하게 마련이니, 무조건 그 자리에 참석해야만 한다.
‘그렇다는 건 역시 계속해서 사고를 칠 수밖에 없어.’
생각을 정리한 무영은 잔뜩 신난 친구 사나를 향해 재차 공격할 자세를 갖추며 외쳤다.
“아무튼, 제 발로 왔으니 이번에는 절대 봐주지 않겠어. 사나, 대련이다!”
“으, 으아, 여기까지 와서 또 대련하자고? 진짜 너도 지독하다 지독해!”
“이봐, 거기 너 꼬마!”
바로 그 순간. 쏟아지는 고함에 상념을 와르르 깬다. 무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주한 친구 사나의 작은 어깨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물러서, 사나….”
“하지만… 무영!?”
친우의 조그맣고 하얀 몸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우락부락한 형체. 무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사나의 등을 가로막고 섰다. 그러자 눈앞의 괴물이 미간을 구기며 험악하게 한마디 했다.
“네놈들 거기서 대체 뭣하고 있는 게야?”
무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축 늘어뜨린 고사리손에 파란 힘줄이 어렴풋이 스쳤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느릿느릿 이어지는 동작 하나하나에 경계심이 조각조각 부서져 어렸다.
얼핏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
그건 역시나 상대에게 공격성을 들키지 않기 위한 무영 나름의 노련한 몸부림이다.
“이놈들아, 또 싸움판을 벌일 생각이지! 여기가 무슨 동네 놀이터인 줄 알아?”
그러나 괴물이 씩씩대며 다가올 즈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무영이 씩 웃으며 외쳤다.
“거, 누군가 했더니 대장이구만!”
그 나이 소년들이 으레 할 법한 어리광처럼 보일까.
제법 밝은 목소리. 그 모습은 얼핏 기뻐하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