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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김세원 Oct 17. 2021

第2章. 구중궁궐의 가시(4)

<화산지연리>

“대장!”


분명한 것은 다가오는 덩치가 간수 대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무영의 반응이다. 제법 어리숙한 장난꾸러기 짓을 하며, 무영이 덩치를 향해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쪽은 취포음와(醉飽淫臥)요. 재미있는 놀이 중이니, 늙은 소는 방해하지 마쇼.”


취포음와. 잔뜩 취하도록 배불리 먹고 음탕하게 누워 자듯 문란하게 논다는 뜻이다. 


물론 무영이 당연히 사나와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당초 무영에게 사나는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친구. 무영이 이런 뜬금없는 신소리로 간수 대장의 으름장을 맞받아친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니 뭐야, 이놈이! 또 어디서 못된 장난을 배웠지!”


그러자 이 모범수 아재가 또 식겁하며 무영과 사나를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듯한 기세다. 물론 애당초 무영이 노리던 바이긴 했다. 소년이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한마디 한다.


“흠? 저기 이번방의 꺽다리 아재가 대협들은 이렇게 말한다던데…?”

“아이고, 또 꺽다리! 이놈의 꺽다리 새끼는 도대체가 애들에게 무얼 가르친 게야!”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동그랗게 모아 뜨고서 깜박깜박. 뭔가 이딴 짓을 하는 자신도 미묘하게 오글거렸지만 무영은 꾹 참았다. 


물론 저쪽 옥사의 꺽다리 아재가 가한 괴롭힘에 대한 고변도 사이사이 깨알같이 덧댔다. 그러자 알아서 포효하는 간수 대장이었다.


“내 이것을 당장 물고를 내리라!”

“그나저나 있지, 대장!”


추가로 저것을 더 동댕이치는 일 또한 놓칠 수 없다. 무영이 식겁한 간수 대장을 향해 제법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이렇게 다시 말을 보탰다.


“대장 표정은 왜 그러오? 정말 자지 못해 문제라도 있는 게요?”

“요 쪼그만 것이 맹랑하게 어디서 그런 몹쓸 소릴 주워 들은 게냐!”

“그거야 꺽다리 아재가 말하던걸! 어쩌면 대장… 역시, 영 멀쩡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만!”


씩씩대는 상대의 반박 따윈 간단히 묵살. 도리어 겁 없이 저보다 덩치 큰 간수 대장의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샐쭉 웃어 보이는 무영이다.


“그래서 대장, 서긴 서요?”

“야, 이놈아!”


시뻘개진 얼굴로, 당황한 간수 대장이 무영을 향해 재차 윽박질렀다. 콰콱!


“아야야….”

“네놈도 싹수가 노란 것이야, 어린 놈이 벌써부터 그딴 몹쓸 소리나 배워먹고!”


이번에는 조그만 머리통에 꿀밤도 한 대 되게 먹이며, 대장이 또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런 무간지옥에 오래 정 붙이면 못 써, 이놈의 자식아! “

“에이, 대장은 참 걱정도 팔자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 

옥사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영이 깨달은 살 방도가 이것이었다. 


간수 대장의 역할을 맡은 저 덩치 큰 모범수 아재는 생각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나이 어린 무영과 사나, 두 꼬마들을 배려하는 것도, 이 감옥 안에서는 저 아재밖에는 없었다. 아재가 솔직하지 못해서 하는 언사는 고약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어쨌든 무영도 그 사실을 알았다.


“걱정을 안 하게 생겼냐, 이놈아!”


그런 간수 대장을 향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꼬마 무영은 다시 또 한마디 덧붙였다.


“헤헤… 하긴 나도 걱정이오.”


이런 무영의 능청에 놀랐는지 간수 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화산 꼬마 네놈이 그래도 이제 철이 조금은 든 모양이지?”

“거, 당연하고 말고!”


무슨 속셈인지 상대를 향해 씩 웃으며, 무영이 재차 또 이렇게 추임새를 얹었다.


“나 참말로 걱정이다 마다, 우리 아재가 영~ 안 설까 봐.”


콰직. 

물론 이 분노 유발 답변에 회신이라고 돌아온 것은 뻔했다. 


대갈통을 절로 얼얼하게 만드는 간수 대장 아재의 얼큰한 딱밤 한 사발. 여기엔 짜증도 반쯤 담겨 있을까. 


그 와중에도 배를 잡고 낄낄대며 웃는 꼬마 무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간수 대장이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한다.


“어련히 네놈이 내 걱정을 하겠다, 이놈의 자슥! 내 이럴 줄 알았어!”


“하하하! 아니 왜~ 아재도 언능 장가 가야지!”


“어쭈, 이놈이 자기는 마치 간 것처럼 말하는 것 보소? 하하하!”


“내가 진짜 갔으면 어쩔 건데! 하하하!”


그나마 무영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농담 따 먹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아량이 넓은 감옥 사람은 이 간수 대장이 유일했다. 


당최 바깥에서 무슨 죄를 저지르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본디 농군이었다는 그는 성품도 온후하고 너그러웠다. 


덕분에 간수의 직을 맡고, 이들을 통솔하는 대장의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고 했나. 그래서 이젠 감옥이 꼭 자신의 고향이 된 것 같다며 쓸쓸하게 웃기도 수차례. 


그런 상대가 안쓰러웠던 꼬마 무영은 눈치 없는 척 대뜸 또 이렇게 잔소리도 했다.


[아이참, 아재는 장가도 안 갈 셈이요! 죽기 전에 거사는 치르고 가야지~]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농담과 익살을 넉넉히 나눠가진 다음에야 이들의 수다는 끝이 났다. 


죄수들의 투기장이나 노름판에 딱히 관심이 없는 간수 대장이었기에, 간간히 제 적적함을 달래주는 꼬마 무영의 재롱을 달갑게 여기고 있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저 간수 대장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결코 무사하기 힘들었을 상황도 무영에게 종종 존재했기 때문이다.


“있잖아, 무영!”


다시 기분이 좋아진 간수 대장이 순찰을 돌러 자리를 비운 사이, 이번에는 사나가 말을 꺼냈다.


“너도 소식 들었겠지만, 얼마 안 있으면 곧 전창날이야.”

“전창날이라.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전창(塡倉)날. 기나긴 정월 연희의 마지막 날을 이르는 말이다. 


무영은 쓰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전창날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그나저나, 또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게 생겼군.’


솔직히 듣기만 해도 속이 역한 기억. 황실 감옥이라 해서 항시 좋은 음식을 먹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놈의 지긋지긋한 기름밥(油盤)이라면 기름내에 물려 토하고 싶을 만큼 먹을 터였다.


‘끔찍하군.’


무영은 우울했다. 황실 감옥의 기름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맛이 없었다. 이건 고슬고슬한 밥알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맛이라든지 그런 호화로운 수준은 당연코 아니다. 


이 나라의 죄수들은 으레 관리들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싸구려 기름에 볶아 내온 음식으로 허기를 달랬다. 바로 그게 이 기름밥의 정체였다. 이건 정말 최악의 정월 만찬이었다.


사실 이 기름밥이라는 것도 관리들이 먹다 남긴 음식 쓰레기를 재활용한 요리에 불과했다. 


이걸 어떻게 요리라 부를 수 있을까! 

그나마 관리들이 먹던 것을 천한 죄인에게 허용했으니 이를 감사히 여기라는 게 저들 속내일 터. 어쨌든 이런 찌꺼기로 새해를 보내다니 정말 끔찍하다.


물론 그렇다고 무영이 화산의 사부와 형제들 곁에 있을 때 딱히 풍족하게 먹고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시절이 음식 폐기물을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회상하는 무영이긴 했다.


하다못해 당장 회귀하기 전 그가 있던 시실리국을 생각해도 이보단 훨씬 나은 밥상이었다. 


무영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조만간 목도할 이놈의 정월 기름밥과 영원히 이별할 수 있다면 정말 죽을 때까지 생선과 비린내 진동하는 늙은 양고기만 집어먹고 살아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맛없는 음식 따위….’


그 탓에 얼핏 심란해진 듯도 보이는 무영의 눈을 응시하며, 사나가 조용히 말을 보탰다.


“거야, 원소절이 저번 즈음이었으니 당연하려나.”


“…..”


“그러고보니 무영 네가 잡혀온 날이 2년 전 원소절이었구나!”


“그랬었지. 사나 넌 그때 황실 행렬의 화동으로 나갔었지, 아마?”


“맞아, 나도 다시 기억났다. 세월이 이렇게나 흐르다니, 정말 묘한 걸.”


그 말 그대로였다.

벌써 그날로부터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화산의 사부와 형제들은 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새삼스럽게 자문자답해보았지만, 이곳에선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무영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하, 어찌 잊을 수야 있나!”

“기운 내, 무영. 분명 너도 조만간 이곳에서 나갈 방도가 있을 거야.”


무영의 탄식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답하며, 사나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최근 내시부의 조 공공이 옥사에 와서 기묘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조 공공이?”


조 공공. 그는 광주(廣州) 사람으로 본디 고향인 광주에서 총관부의 허드렛일을 맡아 다루던 하급 무사였다. 무공을 기본적으로 겸비한 자라는 뜻이다. 


그 때문에 조가는 환관으로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내시성 태감 어른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고 했나. 


거기다 이 자는 글자도 어느 정도 쓰고 읽을 줄 알았다. 

궁에서 부려먹기에 금상첨화였다. 


덕분에 간간히 노쇠한 태감을 대리하여 궁의 사무를 처리하는 일까지 맡고 있다고도 들었다. 


어쨌든 궁의 주요 사무를 맡고 있기에, 옥사를 관리하는 일도 바로 이 조 공공의 소관이긴 했다. 바로 그가 근자에 이 뇌옥에 방문했다는 것이다. 무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까지 오다니, 그 영감탱이 대체 무슨 일이지?”


무영이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릴 즈음, 사나가 재차 다시 말을 보탰다. 


“그게… 꽤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 같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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