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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과학, 운명의 연쇄반응

by 법의 풍경

1. 프롤로그: 우연들의 교향곡


백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7시 55분부터 시술실로 이동하기까지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단순한 의학적 처치 과정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우연과 필연이 얽혀 있었다.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각각의 음표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선율을 만들어낸 것이다.


급성심근경색이라는 질병의 잔혹함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숫자들을 마주해야 한다. 돌연사의 80–90%가 급성심근경색이고, 환자의 40%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다. 치료를 받아도 사망률이 30–40%에 달하며, 성공적으로 치료받아도 25%는 6–8개월 내에 재발한다.


이 냉혹한 통계 앞에서,
나의 생존은 기적이었다.



2. 7시 55분, 첫 번째 기적의 시작

교통 상황의 운명적 순조로움

차가 막히지 않아 병원에 예상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 기적이었다.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신기하게 신호등이 모두 파란불이어서 금방 도착했다”고 한다.


이를 단순한 운으로 치부하기에는, 급성심근경색에서 시간이 갖는 절대적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시간이 곧 심장근육”이라는 의학 격언이 있다.

관상동맥이 막힌 순간부터 그 혈관이 공급하던 심장근육은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괴사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되돌릴 수 없다. 다른 장기와 달리 심장은 근육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다시 살아나는 다른 장기와 달리 죽은 심장근육세포는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잘못 관리하는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심장근육이 영구적으로 손상되어, 단순히 생존 여부뿐만 아니라 향후 삶의 질까지 좌우한다.


응급센터 기록상 7시 55분 도착. 집에서 화장실에 다시 들른 10분을 제외하고도 불과 15분 만에 병원에 도착한 것이다. 이는 골든타임 확보라는 측면에서 생사를 가른 결정적 요소였다.



119 vs 자가용, 선택의 딜레마


당시 119를 부를지 자가용으로 갈지 고민했던 순간을 돌이켜보면, 이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딜레마의 전형이다. “별것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소동을 피우는 건 아닐까”, “평소에 건강했으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라는 생각들이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는 급성심근경색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무조건 119 구급차를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구급차에는 니트로글리세린이 상비되어 있고, 심전도 측정기와 산소호흡기도 갖추어져 있어 이송 중 응급처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119 구급대원들도 출동에 우선순위가 있는데 심근경색과 뇌경색은 최우선 순위다. 그만큼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 병이기 때문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아스피린의 4분의 1 크기 정도의 작은 알약으로, 혀 밑에서 천천히 녹여먹는다.

이 약물은 신속한 혈관확장과 함께 심장의 부담을 줄여주어 심근경색 급성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날 아침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지만,
위험한 도박이었다.



3. 응급실, 예상치 못한 절차의 벽들

5분간의 지연, 그 무게

응급실에 뛰어들어가며 “가슴 한가운데를 짓누르고 쥐어짜는 느낌이 너무 아프다”고 외쳤지만,

경비실과 접수대에서 5분을 지체해야 했다.

신분증 확인, 주민번호 확인, 코로나19 방역 절차까지.


당시에는 영원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5분.

하지만 급성심근경색 환자에게 5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 동안에도 심장근육의 괴사는

무자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절차적 지연은 응급의료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병원 입장에서는 코로나19 방역과

환자 신원 확인이 필요하지만,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는 매 순간이 소중하다.

이것이 119 구급차 이용이 더욱 권장되는

또 다른 이유다.



코로나19 시대의 추가 변수


특히 2020년 팬데믹 상황에서는 추가적인 방역 절차가 불가피했다. 외국 방문 여부, 체온 측정, 접촉자 확인 등의 과정이 응급 상황에서도 생략될 수 없었다.

이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당시 의료 현실의 단면이기도 했다.



4. 응급실 내부: 의학교과서의 현실화

방사통, 심장의 절규가 팔로 전해지다

응급실 입장 즉시 왼팔 저림을 호소했을 때,

의료진의 반응이 달라졌다.

이것이 바로 방사통(radiation pain)이었다.


방사통을 이해하려면 신경학적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심장에서 발생한 통증이 목, 턱, 어깨, 팔로 퍼져나가는 것은 해부학적 신경 연결 때문이다.

심장과 이 부위들이 같은 신경절에서 나오는 신경들로 연결되어 있어, 뇌가 통증의 정확한 위치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방사통의 패턴은 심근경색 진단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남성의 경우 심장에서 온몸으로 피가 퍼져나가는 방향인 왼쪽 어깨와 팔로 퍼지는 통증이 전형적이며, 여성의 경우에는 목이나 턱 부위의 통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내 증상은
의학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서맥의 역설


“어… 심장이 너무 안 뛰어요.”

인턴의 당황스러운 목소리.

분당 50회의 서맥 때문이었다.


이 상황은 의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서맥은 심장이 강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다. 운동선수들이 서맥을 갖는 이유는 심장근육이 발달해서 한 번의 수축으로 더 많은 혈액을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성심근경색 상황에서는 이런 서맥이 의료진을 당황시킬 수 있다. 심근경색 환자들은 보통 빈맥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통증과 스트레스로 인해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인데, 나는 오히려 더 늦게 뛰고 있었다.


이는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심장의 습관이 죽음의 순간에도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기한 현상이었다.



5. ST Elevation: 심장의 마지막 외침

심전도 결과가 나왔을 때, “II, III, aVF에서 ST elevation 관찰”이라는 진단명이 내려졌다.

이는 우관상동맥 폐색을 의미하는 명확한 신호였다.


심전도를 이해하려면 심장의 전기적 본질을 알아야 한다. 심장근육은 박동할 때마다 피부에 미세한 전기신호를 방출한다. 심전도 장비는 이런 전기신호를 감지해서 심장의 상태를 파악하는 정교한 번역기 역할을 한다.


12개의 leads는 마치 12개의 다른 관찰점에서 심장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건축가가 하나의 건물을 설계할 때 정면도, 측면도, 평면도 등 여러 각도의 도면이 필요한 것처럼, 심장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해야 정확한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ST elevation은 평평해야 할 ST segment가 상승곡선을 그리는 현상으로, 관상동맥이 완전히 막혔다는 심장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에필로그: 시간과 우연의 교향곡

이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면, 수많은 우연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생명을 구한 기적의 연쇄반응이었다.

D-12의 검색, 신호등들의 파란불, 빠른 이송,

정확한 진단, 그리고 숙련된 의료진의 신속한 대처.


하지만 이 모든 우연들 뒤에는 필연도 있었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심장, 위기 상황에서의 침착함, 그리고 무엇보다 12일 전 그 작은 호기심이 만든 지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생명을 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때로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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