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이동하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공존하는 경계의 공간이었다.
중환자실 문을 지나는 순간 느낀 첫 번째 충격은 적막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적막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기계들의 교향곡이었다.
심전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삐삐 소리,
인공호흡기의 기계적 리듬,
수액펌프의 미세한 윙윙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현대 의학의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병문안으로 가본 적은 있지만,
환자로서의 경험은 완전히 달랐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70대 이상의 할아버지들이었고, 대부분 의식이 없어 보였다.
연명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인턴으로 보이는 한 의사가 중환자실을 들어오더니 한 바퀴 돌고 나서는 건들거리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야~, 죄다 할배들밖에 없네
그 순간 나도 의문이 들었다.
왜 할머니들은 한 명도 없을까?
그래서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중환자실에는 폐암 환자들이 가장 많다고 한다. 담배로 인한…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이 현실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한 40대 직장인이었던 내가,
지금은 이 죽음의 대기실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왼팔에는 매시간 자동으로 혈압을 측정하는 밴드가 감겨 있어서 한 시간마다 팔을 조여왔다. 가슴은 여전히 아팠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계속되었다.
대퇴동맥 시술 부위는 지혈을 위해 무거운 모래주머니로 눌러서 지압하고 있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혈전이 다시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헤파린이라는 약물을 계속 투여받고 있어서 피가 잘 멎지 않았다.
한 시간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지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들어서 확인하고 다시 놓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는 출혈과 혈전 형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맞추는 의학적 예술과 같았다. 헤파린을 너무 많이 투여하면 출혈 위험이 높아지고, 너무 적게 투여하면 혈전이 다시 형성될 위험이 있다. 의료진들은 이 위험한 줄타기를 24시간 내내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두통을 호소하자 의료진은 혈관확장제로 인해 뇌혈관도 넓어져서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심장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이 뇌혈관에도 영향을 미쳐 두통을 유발하는 것이다.
“못 참겠으면 타이레놀을 복용하세요.
하지만 약을 먹으려면 음식을 먹어야 해요.”
간호사가 죽을 주었지만, 식욕이 없어서 겨우 두세 숟가락 정도만 먹을 수 있었다(웬만해서는 식욕이 없어지지 않는 내게는 드문 경험이었다).
이는 의학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모든 약물은 주효과와 부작용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의료진은 이익과 위험을 신중하게 저울질해야 한다.
중환자실은 24시간 내내
각종 소리들로 가득했다.
옆 침대의 할아버지는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xx가 여기와 있어! 빨리 가자"고 하셨다. 치매까지 겹친 상황으로 보였다.
아니면 저승사자를 본 것인가?
간호사가 다가가서 더 큰 목소리로
“할아버지, 여기 어디야? 내가 누구야?
여기 백병원! 나는 간호사!”
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가래 뱉는 카악질 소리가 중환자실을 떠나갈 듯 컸고, 간호사는 “할아버지!! 뱉어, 뱉어!!”라고 큰 목소리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무한 반복되었다.
모든 중환자의 심전도, 혈압, 심박수, 산소포화도 등이 중앙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표시되었고,
이상 신호가 감지될 때마다 비상벨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이런 소음들이 견디기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보면 잠을 자기 어려운 최악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이것들이 모두 생명을 지키기 위한 소중한 소리들임을.
이렇게 생각하니 여러 소리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영화 “어거스트 러쉬”에서 주인공이 일상의 소음을 음악으로 듣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심전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삐삐 소리는
메트로놈처럼 들렸고,
인공호흡기의 기계적 리듬은 베이스 라인이 되었다.
간호사들의 발걸음 소리는 스타카토처럼,
할아버지들의 신음소리는 애수 어린 멜로디처럼 들렸다.
이 모든 소리들이 합쳐져서 생명을 지키는
거대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주치의의 설명에 따르면, 심장근육 중 살아날 수 있는 부분은 약을 잘 복용하고 1년 정도 재활을 성실히 하면 회복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마치 동상에 걸린 조직이 일부는 회복되고 일부는 괴사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심장근육세포는 한 번 죽으면 재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 상태에 있는 세포들은 적절한 치료와 재활을 통해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의학 용어로는 ‘stunned myocardium’
또는 ’hibernating myocardium’이라고 부른다.
“혈전을 제거했지만 남은 혈전이 혈관을 돌아다니며 다른 곳에서 막히거나 재발할 수 있으므로 지속적으로 혈관확장제와 혈전용해제를 투여해야 합니다.”
이는 급성심근경색 치료가 단순히 막힌 혈관을 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진짜 치료는 시술 이후에 시작되며, 재발 방지와 심장 기능 회복을 위한 장기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면회 시간이 되어 아내가 왔을 때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이 났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후 삶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기분 나쁜 가슴통증이 찾아왔다.
“혈관을 스텐트로 뚫어놓았다고 해서 바로 괜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 피를 공급받지 못한 심장근육은 즉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주치의의 설명이었다.
회복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긴 여정이 남아있었다.
밤이 되면 주변이 조용해지니 오히려 할아버지들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비상벨 소리도 계속 나고,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1–2시간마다 계속 들추어보고, 혈압측정기가 한 시간마다 팔을 조여 오고, 수액선이 꼬이는지 기계에서 삐삐 거리는 소리가 났다.
객관적으로 보면 잠을 자기 어려운 최악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당직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이 너무 고마웠다.
잠은 못 자지만 여러 가지 소리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이는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는 경험이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옥이 될 수도, 성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환자실에서의 경험은 현대 의학의 두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정밀한 과학기술로 생명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 돌봄으로 희망을 전달한다.
심전도라는 기계가 내 심장의 전기적 언어를 번역해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의 힘이었다. 하지만 밤새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의 헌신과, 소음을 음악으로 바꾸어 듣는 마음의 힘은 과학을 넘어선 인간적 영역의 일이었다.
중환자실은 단순히 치료를 받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철학적 공간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생명의 소중함과 동시에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동시에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마음이 모여야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