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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실에서 다시 열린 철학의 문

by 법의 풍경

24시간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증상이 많이 좋아졌으니
오후에 일반병실로 옮기겠습니다.”

주치의의 말을 듣는 순간,

안도감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고작 24시간이었지만, 이 중환자실은 내가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온 다리 같은 곳이었다.



작별 인사

“모래주머니도 빼고,
천천히 화장실 정도는 왔다 갔다 해보세요.”

드디어 허벅지를 짓누르던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제거되었다. 24시간 동안 나를 침대에 붙잡아두던 마지막 사슬이 풀린 셈이었다.


맞은편 침대의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24시간 내내 아무런 움직임 없이 누워계셨다.

밤낮 구분 없이 계속 그 자세로.

“혹시 연명치료 받으시는 분인가요?”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명치료는 아니에요. 대부분 폐암 환자분들이고, 치료 약물 투여 때문에 저렇게 계세요.”

폐암. 그 무서운 단어가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운이 좋았다. 심근경색은 적어도 뚫을 수 있는 혈관이 있었고, 스텐트라는 해결책이 있었다.

하지만 저분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다시 한번 밀려왔다.

동시에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일반병실로의 이동


오후가 되자 아내가 왔다. 중환자실에서는 면회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함께 병실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천천히 해. 무리하지 말고”

아내가 내 팔을 부축했다.

휠체어는 필요 없다고 했다.

스스로 걸을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회복의 증거였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24시간 누워있던 몸이 중력을 다시 기억해 내는 과정이었다.

아내의 단단한 팔에 의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복도로 나서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중환자실의 긴장감 대신 일반병동의 일상적인 소음들이 들려왔다. 간병인들의 대화 소리, 환자들의 발걸음, 멀리서 들려오는 TV 소리.



4인실, 새로운 동거인들

“코로나 때문에 1, 2인실은 가득 차서 4인실만 가능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은 자리가 하나뿐이어서 바깥쪽 자리였다. 바로 앞에 간호사 데스크가 있어 사실 나쁘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즉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안쪽에는 할아버지 두 분이 계셨다. 한 분은 응급실에서 봤던 분들처럼 계속 “카악” 소리를 내며 가래를 뱉어내고 계셨다. 폐 쪽 질환이 분명해 보였다.


다른 할아버지는 목소리가 정정하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분도 한 분 계셨는데, 퇴원을 앞둔 분인지 바깥출입을 자주 하셨다. 병원 밥도 안 드시고, 들어와서는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만 보셨다.


"예전엔 병실에 TV가 있었는데, 이젠 없네?”


다행히 보기 싫은 TV 프로그램을 강제로 봐야 하는 고역은 피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병원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이 달랐다. 병문안은 보호자 외에는 금지였고, 보호자 접견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가족들도 궁금하고, 회사도 궁금할 텐데…”
"핸드폰 달라고 할 줄 알았어.”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핸드폰은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성경책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시 핸드폰을 보고 싶어 하는 내가 한심하네.”
“지금은 쉬는 게 중요해.”

현명한 아내였다. 그리고 고마운 것은 귀마개도 함께 가져온 것이었다.



첫날밤의 적응


밤이 되자 새로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중환자실과 달리 문이 따로 없었고, 바로 앞에서 간호사들이 밤새 오갔다. 주기적으로 혈압을 재고, 체온을 확인하고, 약물을 투여했다. 가슴에는 여전히 심전도 전극이 붙어있어 불편했다.


그래도 중환자실보다는 훨씬 나았다.


할아버지들의 숨소리, 가래 뱉는 소리, 간호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섞여서 만들어내는 병실의 밤 교향곡. 처음에는 시끄럽게 느껴졌지만, 이것들이 모두 생명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다.



D+2, 새로운 일상의 시작


다음날, 창가의 두 할아버지 가족들이 돌아가며 간병하는 모습을 봤다. 어제는 둘째 아들이 밤새 곁을 지켰고, 오늘은 큰아들이 왔다. 그런데 큰아들도 약간 장애가 있어 보였다.


문득 우리 회사를 나간 J상무가 생각났다. 한때 주말마다 아버님 간병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던 그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가족들이 참 힘들었겠다.’

간병은 환자만의 고통이 아니었다. 가족 모두의 시련이었다.



조심스러운 재활의 시작

“심근경색으로 상한 심장근육은 너무 많이 움직여도 문제고, 너무 안 움직여도 문제예요.”

주치의의 설명이었다.


“적정한 강도의 재활이 필수적이에요.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화장실만 왔다 갔다 했다.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가 마라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점차 같은 층을 조금씩 걸어보기 시작했다.


아내가 면회를 오면 함께 병실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서울 상계동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복도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그 시간이 소중했다.



닫힌 문을 다시 열다

오랜만에 성경책을 펼쳤다. 활자들이 시간의 터널을 만들어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어머니 따라 교회에 다니던 어린 시절. 별생각 없이 따라 하던 그 시절을 지나, 사춘기가 왔고 질문들이 쏟아졌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믿음과 의심.


아파트 옥상. 그곳이 나의 철학 연구실이었다. 그때 내린 결론은 냉정했다. ‘이건 내 머리의 한계를 넘어선 문제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선택만 하자.’


실용주의적 계산이 시작되었다. 신앙을 버릴 때 오는 이익 대 불이익. 저울질 끝에 기존 신앙을 유지하기로 했다. 잠정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그 ’잠정적’은 계속되었다.



다시 시작된 질문들

이제 다시 그 닫힌 문을 열었다. 침대에 누워서 처음부터 생각해 봤다.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일신인가?

여전히 과학이나 이성의 영역에서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증명되지 않는, 이성적이지 않은 것을 믿기로 선택하는 것일까?


반대로 신이 없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빅뱅 이론도 있지만 빅뱅 이전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어렵다. 감정적으로는 인간이 발전된 고등동물 중 하나라는 생각에 반감이 컸다.


신이 없다고 가정하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

그 허무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행복 추구, 쾌락주의로 발전할 것 같았다.

어쩌면 신앙도 행복 추구의 한 형태일지 모른다.



변호사의 습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면, 인간의 지식 한계를 넘어선 창조주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자라온 환경 때문일 수도, 타고난 성격 때문일 수도, 알 수 없는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체험의 영역은 어떨까? 나는 직접 체험한 적 없지만 주변에서 예언이나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봤다. 신내림 받았다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잘 맞추는 것도 봤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이 곧바로 신의 존재나 기독교 하나님의 유일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옛날 귀신이라던 것들도 지금은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경우가 많다. 현재 과학으로 설명 안 되는 것도 미래에는 가능할지 모른다.


직업병인지 나는 민사소송법상 판사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자유심증으로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의 존재는 그런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불가지론으로 귀결되는 것 같았다. 신은 존재하지만 그 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는. 이게 가장 ’합리적’이다. 아니, 논증의 영역이 아니니 ’그럴듯하다’가 맞겠다.


사실은 그럴듯하기보다는 심정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다.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허무감을 피하기 위한 반작용일 수도 있고, 기독교식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누군지 ’모르겠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이 맞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믿음에 대한 믿음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교회를 다니는 행위가 믿는다는 증명인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믿는다는 증명인가?

결국 “믿는다고 생각하는 나의 상태” 그 자체를 다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에셔의 그림에서 보이는 무한루프 같은 순환논리였지만, 어쩌면 신앙의 본질일 수도 있었다.



퇴원 후의 계획

창밖으로 서울 초봄 하늘이 보였다. 회색빛 구름들 사이로 가끔 햇빛이 스며들었다.

‘퇴원하면 시간을 갖고 천천히 연구해야겠다.’


급성심근경색은 내 몸을 고쳤지만, 동시에 내 영혼에도 새로운 질문들을 남겨놓았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치유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전 중환자실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병실 동료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내일은 또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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