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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 2

미완성이어도 괜찮아

by 남지만 작가


올해도, 내년에도, 아마 그다음에도

결혼한 지 어느덧 25년.
세월이 강산을 두 번을 넘게 바꿔놓았는데,
추석만큼은 늘 그대로다.

명절 연휴가 흘러나올 때면
내 안에서는 어김없이 오케스트라가 울린다.
'올해는 기필코!'
그 웅장한 교향곡이 시작되면,
나는 잠시 ‘가장’이라는 이름을 벗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며칠을 꿈꾼다.

모두가 잠든 전날 밤,
내 머릿속은 비밀스러운 계획들로 반짝인다.

책상 위에는 박경리의 토지.
몇 해째 펼치지 못했지만,
이번엔 꼭 읽어보겠다고 다짐한다.

보지 못한 영화, 듣지 못한 음악,
걸어보지 못한 길들이 내게 손짓한다.
그 짧은 상상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아침이 밝는다.
집안의 불이 하나둘 켜지고,
그 순간 모든 계획은 현실의 바람에 흩어진다.

‘아버지’, ‘남편’, ‘큰아들’이라는 이름이
조용히 나를 불러 세운다.

책 대신 예초기를 들고,
영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켠다.
힐링 음악 대신 들려오는 건
“부릉부릉”, “으쌰으쌰”, “요즘 회사는 어때?”
명상 대신 명령이,
트레킹 대신 마트와 휴게소가 내 일정을 채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모든 분주함이 미워지지 않는다.

연휴의 끝자락,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스며든다.

읽지 못한 책, 보지 못한 영화,
듣지 못한 음악들이
아쉽기보다는 이상하게 따뜻하다.

그 미완의 목록들이
내년을 향한 약속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음엔 꼭…”
그 한마디가 올해의 마침표가 된다.

나는 안다.
내년 추석 전날 밤,
또다시 똑같은 다짐을 할 것이다.

“올해는 기필코!”

그리고 그 다짐이
또다시 무너져도 괜찮다.

이루지 못한 시간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자라나고 있으니까.
해마다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품는 마음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으니까.

명절이 끝나고,
손에는 토지 대신 밀린 업무 서류가 들려 있지만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이 아쉬움이야말로
25년 동안 내가 지켜온 가장의 연례행사이며,
조용히 나를 숨 쉬게 하는
삶의 리듬이니까.

선생님의 추석은 어땠나요?
혹시 당신에게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만의 목록’이 있나요?

내년엔 그중 딱 하나만이라도
살짝 완성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린 또 한 해를 견딜 힘을
조용히 얻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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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