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의 천국

The docuphile

by 매버지

지난달 딸이 유치원에서 소풍을 가는데, 소풍 전 날 갑자기 긴장되는 말을 던졌다.


"아빠, 김밥 예쁘게 싸줘야 해."


큰일이다. 그냥 아이가 좋아하는 재료로 계란, 햄, 말랑말랑 김치(내가 끓인 김치찌개 속 김치)만 넣은 김밥을 싸려고 했는데.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김밥 예시로 들어준 사진 이미지가 하필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동물을 본떠 만든 김밥이었나 보다. 나는 부랴부랴 쿠팡으로 스마일 모양 김 펀칭, 하트 모양 주먹밥 틀을 샀다. 새벽에 도착한 도구를 활용해 겨우 조금 모양을 내어 싼 도시락. 그러나, 아이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통으로 돌아온 도시락통에 괜스레 기분은 좋았던 기억이 있다.

딸, 다 먹어줘서 고맙다~ㅋ


우연히 보게 된 MBC 경남의 다큐멘터리 '김밥의 천국'은 평범한 한 줄의 김밥이 한국인의 삶, 역사를 담고 있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불어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기까지의 여정을 경쾌하게 알려주는 다큐멘터리였다.


다큐 1부에는 국내 5만 개가 넘는 김밥집 중 전국의 손꼽히는 가게들이 등장한다. 속재료가 간편하고 저렴한 김밥부터 20만 원이 넘는 파인 다이닝 김밥까지 다양하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방식, 지역 특산품과 연계된 재료에 담긴 역사, 심지어 외국에서 그 도시의 스타일에 새롭게 재해석되는 김밥까지. 특히 통영에 들르면 꼭 먹게 되는 충무김밥이 뱃사람들이 더운 날씨에도 상하지 않는 김밥을 먹기 위해 김밥과 속재료를 분리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을 처음 알게 되었다. 김밥 한 줄이 어떻게 지역의 역사와 민초들의 삶과 연결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인상 깊었다.


다큐의 2부에는 김밥이 세계 곳곳에서 새롭게 자리 잡는 장면들이 나온다. 뉴욕의 젊은 셰프가 파인다이닝으로 재창조한 김밥, SNS를 통해 냉동김밥을 유행시킨 미국의 인플루언서, 프랑스나 일본에서 김밥이 ‘K-컬처의 일상 음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습들. 김밥이 이렇게 넓어지고 변화할 수 있는 건 오히려 김밥 자체가 지닌 포용력 때문이 아닐까? 모든 재료를 받아들이고 쌓아 올린 뒤 조심스럽게 말아 하나로 묶어내는 그 방식처럼 말이다. 결국 다큐는 말한다.


김밥은 흔하지만, 결코 가벼운 음식이 아니다.


다큐를 보고 난 후 문득 초등학교 2학년 소풍 때 기억이 났다. 맞벌이로 바쁘셨던 어머니는 격무에 시달려 늦은 퇴근을 하는 바람에 김밥재료를 준비하지 못하셨다. 궁여지책으로 이른 아침 일어나 싸주신 김밥에는 간장과 참기름 그리고 참깨가 뿌려진 밥만 들어갔고, 전전날 먹고 남은 양념치킨 몇 조각을 함께 도시락 통에 넣어주셨다.


지금이라면 맛있게 먹었겠지만, 그땐 왜 그랬는지 친구들의 오색찬란한 김밥에 비해 초라한 내 김밥이 창피했다. 소풍장소에 도착한 나는 친구들을 피해 구석진 곳에 앉아 홀로 김밥을 먹었는데 어린 마음에 살짝 서러웠나 보다. 대충 몇 개 먹고 도시락 뚜껑을 닫은 후 집으로 돌아와 바로 설거지 통에 넣었다. 퇴근 후 돌아오신 어머니는 뾰로통한 아들의 눈치를 살피셨던 기억이 난다.


다큐를 다 보고 난 후, 나는 김밥을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이렇게 평범한 음식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야기와 정성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아리게 다가왔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그 기억도 조금은 다른 온도로 다시 재해석하게 되었다.


김밥에는 결국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들어간다.
그게 가장 큰 속재료다.


당신에게 김밥은 어떤 사랑을 주었는가?
누군가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이었는지,
혼자 조용히 먹던 작은 위로였는지,
혹은 여행을 떠나는 길에 손에서 놓지 않았던 한 줄의 든든함이었는지.


당신의 김밥을 떠올려 보면,
그 안에 담긴 당신의 삶과 추억이 함께 펼쳐질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김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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