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주의자#2
봄, 여름, 겨울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이 주는 분위기와 날씨, 옷차림, 떨어지는 낙엽,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스산함은 내가 예찬하는 요소를 다 갖추었다. 덥다와 춥다로 구분되는 여름과 겨울, 세상이 깨어나는 파릇한 봄과는 다르게 가을은 적당히 복잡하고 외롭다. 그 외로움 마저 나는 좋은 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여름 한가운데 낳아 주셨다. 7월 중순 즈음이면 가장 쨍쨍할 때 아닌가. 나를 나으시고, 더운 여름을 나시느라 고생하였으리라. 나 역시 더위를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느꼈던 그 뜨거움이 가고 첫 번째 계절인 가을이 좋은 걸까?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해본다.
아내와 결혼도 가을에 했다. 11월, 가을이 가실무렵 즈음. 지금 생각해 보면 더 이르게도 할 수 있었지만 가을에 하고 싶었다. 딸 역시 가을에 태어났다. 10월 초순. 딱 좋을 날씨에 태어나 나처럼 더위를 겪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런 딸이 놀이터에서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놀 수 있는 계절 역시 가을이다. 곧 추워질 테니 더 추워지기 전에 열심히 뛰어놀아야 한다.
가을에는 괜스레 걷고 싶어진다. 낙엽을 밟으며 걷거나 뛰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아주 경쾌하게 "가을이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그러다 나무를 바라보면 노르스름, 붉으스레 한 나뭇잎들이 가을가을하게 달려있다. 곧 떨어져 나에게 가을이 왔음을 또 이야기해 주겠지.
가을이 되면 꺼내 입는 니트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최애 옷 종류를 꼽자면 니트와 옥스퍼드 셔츠인데 둘은 또 환상의 조합이다. 셔츠 위에 니트를 입고나면 '가을이 왔구먼'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니트는 가볍고, 따뜻한데 입으면 편안하기까지 하다.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초봄까지는 니트를 입을 수 있는데, 나는 심지어 여름에도 마소재의 니트를 가끔 입는다.
가을 하늘 그리고 공기는 청명하다. 어릴 적 가을이면 아버지께서 가끔 산에 나를 데려가셨다. 가을 산을 오르다 보면 더욱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했다. 나무와 흙 향기가 더욱 진해져 코 끝에 닿았고, 정상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면 맑은 가을 하늘이 나를 반겨주었다. 요즘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을 자주 볼 수가 없어서 조금 아쉽다.
가을을 1년의 분기로 바라보면 삼사분기 정도이다. 보통 이즈음이면 봄에 야심 차게 추진했던 일들의 결과물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거나 포기해야 되는 시점이 된다. 예전에는 결과에 아쉽고 한 해의 남은 시간이 부족해 다급하게 느껴지는 일들이 많았다. 요즘엔 그냥 가을스럽게 좀 차분히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좋지 못한 결과는 내 노력의 부족함으로 인정하고, 지금부터라도 시작하거나 깔끔하게 포기한다. 그리고 아직 1분기나 남았음을 감사히 여기며.
마지막으로 가을이라는 이름은 참 예쁘다. 순우리말인 '가을'은 한자어로 풀이하면 [秋; 곡식이 무르익는 계절]을 뜻한다. 사람에게 대입해 보면 나 자신이 무르익는 시간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예전에 친구 녀석이 기르던 말티즈의 이름이 '가을이'였는데, '순이', '덕구' 같은 친구들에 비해 얼마나 단아해 보이던지(물론 순이, 덕구도 참 사랑스럽다). 개인적으로 가을에 태어난 딸의 이름을 가을이라고 짓고 싶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하지 못했다. 혹여 반려동물을 기르게 된다면 난 무조건 '가을이'다.
우리 모두에게 자신만의 가을이 있을 것이다.
완연한 가을이다.
미안하지만, 겨울아 조금만 천천히 오렴.
p.s. 잠시 일 때문에 제주에 와서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서울은 겨울이란다. 이런... 내 가을 돌리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