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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예찬주의자

by 매버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난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바로 시원하고 달달한 씨가 잔뜩 박힌 빠알간 '수박'이다. 수박을 언제 처음 입 속에 넣어봤는지는 모르지만 내 추억이 저장된 기억 속에서 수박은 언제나 옳았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 한 입 베어 문 수박의 시원 달달함은 황홀함 그 자체다.


갑자기 철도 아닌 수박타령인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지지난 주 요즘 어려워 할인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홈플러스를 가족들과 방문했었다. 아이가 포장된 냉동 수박을 먹어보고 싶다고 하는데 바로 옆 매대에 수박이 올라와 있는 것 아닌가? 가격도 저렴한 9,900원(그러나 주중에 다시 가보니 29,900원! 아싸 득템!). 아내와 '이건 사야 해'를 외치며 한 덩이를 들고 집에 왔다.

철이 아니기에 맛이 덜할 것이라는 편견을 보란 듯이 깨고 탄탄한 속살에 당도 높은 맛을 자랑하는 수박이었다. 반통을 먹기 좋게 손질하여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니 어린 딸이 후식으로 오믈오믈 잘도 씹어 먹는다. 나처럼 수박을 좋아할 줄이야. 유전의 힘이다.


학창 시절 운동장에서 땀을 잔뜩 흘리고 집에 돌아와 선풍기 앞에서 냉장고 속 막 꺼낸 반 쪼개어진 수박을 숟가락으로 연신 푹푹 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혼자서 수박 반 통의 3분의 1 정도를 해치우고 나서야 다시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둘 만큼 수박은 중독성 높은 과일이었다. 그 시절 수박의 가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요즘에 비하면 체감상 합리적인 가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당시엔 꼭 슈퍼가 아니라더라도 리어카나 트럭에 수박을 잔뜩 싣고 와 판매하시는 분들도 많아 자주 사 먹었다.


알고 있나요?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는 우장춘 박사가 아니...(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수박을 예찬하기 위해 수박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수박은 과일이 아닌 채소라는 것이다. 수박은 원래 열매를 식용하는 과채류이며 채소에 가깝다. 하지만, 언어학적이나 법적(부가가치세법상 과실류)으로는 과일로도 속하며 많은 이들에게 과일로 더 익숙하다. 수박의 친척뻘인 초본성(줄기에 목재가 없는) 박과 열매인 오이와 호박은 모두 다 채소인데 수박 그리고 비슷한 참외는 모두 과일로 취급되곤 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맛있기만 하면 된 거지.


이렇게 맛있는 최애 과일 수박은 흑인 노예제도와 인종차별과도 연관성을 지닌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이 노예 해방을 맞이한 후 일부는 땅을 얻어 경작을 했다. 그중에서도 수박은 재배가 쉬우면서도 시장에서 잘 팔리는 작물이었고, 해방된 흑인들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로 인해 당시 흑인 공동체 사회에서 수박은 자유와 자립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흑인들의 자유와 성공을 두려워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그들의 자립을 비웃기 위해 수박을 풍자와 조롱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신문이나 엽서, 광고 등을 통해 흑인을 수박만 먹는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그렸으며 이런 이미지가 대중에게 퍼지면서 수박은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종차별은 여전히 이어져 오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최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수박과 관련한 이야기는 아름답다. 자녀계획이 없었던 그녀가 마음을 바꾸고 아이를 낳기로 한 일화인데 작가의 자전소설 [침묵]의 한 부분에 나온 내용이다. 그녀는 잔혹한 현실의 상황들을 보면 고민 없이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럼에도 세상은 살아갈만하고 한 번 살아보게 한다고 그게 죄짓는 일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한 남편의 주옥같은 멘트.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아.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달지 않나. 그런 것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남편의 느닷없는 말에 그녀는 웃음이 터지며 다른 건 몰라도 '여름에 수박이 달다는 건 분명한 진실로 느껴졌다''설탕처럼 부스러지는 붉은 수박의 맛을 생각하며 웃음 끝에 나는 말을 잃었다'라고 한다.


수박을 예찬하며 이렇게 진지하고 감성적인 소재들이 펼쳐질지 몰랐다. 아마도 내게는 수박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완전 맛있다가 전부였기에 그런 거 아닌가 싶다. 한강 작가 남편분 말처럼 나 역시 내 아이에게 세상의 온갖 맛나고 아름다운 것들을 먹이고 보여주고 싶다. 일단 이번 여름에는 수박을 안 끊기고 함께 먹어야지.



*메인 이미지 출처 :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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