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주의자
음식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과거 회사를 다닐 때는 시간을 내어 특별한 요리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 전업주부가 된 이후는 요리가 일상이 되었다. 작년과 올해까지 아내와 딸에게 신선한 제철 식재료로 보다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보게 되었고, 간혹 지방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시장에 들러 현지의 좋은 식재료를 꼭 사 온다. 마찬가지로 해외를 가면 마트에 들러 현지에서만 구매 가능한 소스와 향신료 등을 카트에 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요리를 직접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진 이유는 맞벌이 부모님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누나가 3학년이었던 어느 날 누나와 가스불에 냉동만두를 굽다 온 집안을 태울 뻔했다. 기름이 튄다고 프라이팬 위에 덮어 둔 신문지에 불이 붙어 버린 것이다. 똑똑했던 누나가 물을 뿌리려던 나를 막고 이불을 덮어 껐지만 한동안 집에 탄 냄새가 진동했다. 그날 이후로 부모님은 가스레인지 사용을 한동안 금하셨음에도 나는 자주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고,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계란프라이 정도는 직접 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요리와 관련한 당시 추억 중 하나는 큰 밥통(?)에 카스텔라를 만들어 먹었는데 주말이면 온 가족이 앉아 반죽을 조물 거리고 밥통에서 구워지는 카스텔라를 기다린 기억이 난다.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노오란 카스텔라를 우유에 찍어 먹던 기억이 좋았는지 여전히 내 최애빵은 카스텔라다. 어린 시절부터 요리는 내게 재미있는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 덕에 요리실력이 일취월장하셨다. 그 와중에 아버지의 가게 일까지 도우시느라 집안일에 충분히 몰두하기는 어려우셨을 것이다. 그래도 자식들을 위해 한 번 해두면 오래 먹을 수 있는 곰탕, 카레, 김치찌개 등을 자주 만드셨다. 물릴 법도 하지만 성장기 나의 먹성은 어마어마했기에 큰 대접에 밥을 한껏 떠 카레나 김치찌개를 말아먹으며 늘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을 마치시고 돌아온 저녁에는 슈퍼나 시장에서 제철 식재료를 사 오셔서 맛있는 요리를 해주시려고 노력하셨다. 그리고 본인이 식당에서 먹어 본 음식이 맛이 있으면 집에 와서 꼭 만들어 보곤 하셨는데 그런 모습들이 내게도 인상적이었는지 나도 그렇게 하는 편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고급(?) 입맛이 되어갔다.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에 상경한 뒤 먼저 올라온 누나와 함께 지냈고 누나는 아주 가끔 요리를 했다. 대부분 어머니가 올려 보내 주신 밑반찬으로 식생활을 해결했고, 집보다 밖이 좋았던 나는(그땐 왜 그랬지? 지금은 집이 너무 좋은데..)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덧 나는 저렴하고 자극적인 바깥 음식에 길들여진 싸구려 입맛이 되어버렸고, 제대 후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 누나 덕분에 홀로 지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요리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도전한 음식은 카레였다. 어린 시절 자주 먹었던 카레는 재료를 손질하여 기름에 볶고 물을 넣고 끓인 후 카레가루만 넣어 잘 저어주면 되는 음식이었기에 자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만든 카레는 생각보다 너무 맛이 없었다. 레시피를 잘 지키며 했다면 어느 정도 맛이 나야 하는데 뭔가 싱겁고 씁쓸한 맛이 나는 카레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료의 양과 물 조절의 실패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내가 요리에 소질이 없나 보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요리를 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만들 음식을 생각하며 장을 보는 과정부터 재료를 다듬고 써는 동안의 경쾌함, 만들어진 요리를 먹거나 누군가에게 대접하고 피드백을 기다리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요리를 하는 동안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할 수 있었다. 원래 잡생각이 많은 나였기에 요리를 하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점이 점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을 도전해 보게 되었고 이후에는 요리뿐만 아니라 요리도구, 그릇 등 에도 제법 관심이 생겼다. 그렇게 조금씩 요리에 스며들게 되었다.
결혼을 하면서는 더욱 요리에 정진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내는 요리를 정말 못했다. 혼자 살아본 경험이 짧고 직접 요리를 한 적이 거의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 전 아내가 나에게 약조한 것이 '6개월만 시간을 주면 당신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요리 실력의 10분의 1도 못 따라온다. 전업주부가 되기 전에도 집에서 해 먹는 요리 대부분은 내가 했고, 지금은 전부 다 내가 하고 있다. 그게 훨씬 더 합리적이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길이라고 결론 내렸다. 누군가는 그런 상황이 억울하고 서운하냐는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결혼생활 중 요리는 잘하는 사람이 전담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 시간이 흐르며 이제야 어른들의 음식을 조금씩 탐하는 시기가 되었다. 물론 아직은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먹지 못하지만 내가 끓여 준 김치찌개를 유독 좋아한다. 김치찌개를 그대로 즐기는 게 아니고 김치찌개 속 김치만을 '말랑말랑 김치'라고 칭하며 6개월째 매일 드시는 중이다. 이 말인즉슨 나는 지난 6개월 동안 매주 1회 이상 꾸준히 김치찌개를 끓여 왔다는 말이다. 아이가 먹어야 하기에 김치 소로 사용된 각종 양념을 살짝 물에 씻어낸 후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 그리고 두부를 넣고 푹 끓여 대접한다. 아침이면 김에 밥과 말랑말랑 김치를 넣어 말아 접시에 올려주면 마치 스시 오마카세를 드시듯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먹는 것만 보아도 대견하다.
이삼십 대에는 요리를 하면서 느낀 몰입감과 맛있게 먹어주는 상대방을 보며 느낀 행복감이 좋았다면 지금은 좀 달라졌다. 내가 만든 요리를 가족과 함께 먹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식구를 한자로 풀이하면 食(먹을 식) 口(입 구)로 같은 집에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이게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깨닫는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늘 야근을 일삼던 나였기에 가족들과 하루 한 끼를 나눠 먹는 일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는 정반대로 바뀌어 그렇지 않은 날이 드문 시절을 보내고 있다. 매일 저녁 내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먹으며 온 가족이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보내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어린 시절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신 어머니가 왜 그렇게 열심히 가족들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드셨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는 뭘 만들어 먹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