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주의자
큰일 났다.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와 개인적인 일이 겹치며 글 쓸 겨를도 없이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예찬주의자’ 연재를 이어오며 틈틈이 내가 예찬하는 것들을 노트해뒀지만, 이상하게도 딱히 쓰고 싶은 주제가 없었다. 결국 아껴둔 치트키를 꺼낼 수밖에. 이번 예찬의 대상은 나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나이 마흔에 얻은 귀엽고 명랑한 그녀는 내게 연구대상이자 거울이다.
연구대상이라는 건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여성의 생애를 높은 밀도로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누나는 있었지만 여동생은 없었기에, 이런 섬세한 감정과 감성을 함께 감당하는 일이 늘 새롭고 낯설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 다르다. 그렇기에 더 조심하고 배려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그녀는 어느새 자아가 또렷한 여섯 살이 되었다. 시키는 모든 일에 “싫어!”를 외치고, 내가 골라준 옷은 단칼에 거부한다. 칫솔질을 좀 더 꼼꼼히 하도록 도와주려 하면 도리어 짜증을 낸다. 처음엔 귀엽게 봐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슬슬 짜증도 차오른다. 혼도 내보고, 차근차근 설명도 해봤지만 차도는 없다.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는 수밖에. 언젠가 반대 입장이 되어보길 바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결국 아비는 흡수력 좋은 샌드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 인생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녀는 또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나의 말투, 감정, 행동, 심지어 생각까지 고스란히 비친다. 유독 내가 가진 못난 구석들이 그녀에게 닮아 보이는 건 왜일까. 반면 몇 안 되는 좋은 구석들은 왜 그렇게 잘 숨는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그것도 보이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못난 구석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부모님이 떠오른다. 늘 바쁘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살림과 육아와 시집살이를 도맡아 해낸 어머니. 원더우먼처럼 척척 해내셨지만, 속은 얼마나 곯아 있었을까. 그리고 그 희생의 대가로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기대는 결국 무거운 짐이 되어 누이와 내 어깨를 눌렀다. 특히 누이는 그 짐을 마음 깊숙이 품어버렸다. 딸이라 그랬을까. 어머니를 이해하려 애쓰던 누나는 지금 모든 끈을 놓아버렸다.
나 또한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 나도 모르게 딸에게 내 기준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운데. 처음엔 세상에 건강하게 태어나준 것만으로도 감사했었다. 말이 더딘 아이가 어눌한 발음으로 한 단어만 내뱉어도 감탄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이름을 척척 쓰는 아이를 보고, 숫자를 백까지 세는 아이 친구를 보며 내 아이에게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똑똑한 아이보다 행복한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면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 함께하며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분명 그녀도 자신만의 텃밭을 가꾸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 텃밭 곁에서 조용히 물을 주고, 태풍과 비바람을 막아주는 사람이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녀는 내 최애의 아이니까 예찬의 이유를 길게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예찬보다 훨씬 더 상위의 개념이기 때문에. 지금 옆에서 “아빠, 얼른 와서 같이 자자”며 졸라대는 딸을 외면하지 못해 급히 글을 마친다. 예상치 못한 치트키를 써버렸으니 다음 연재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이어가야겠다,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