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주의자
누군가 '당신의 소울푸드가 무엇이요?'라고 묻는다면 지체 없이 순댓국이라 답한다. 그런데 20대 이전 맛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고향 광주에서 지내는 동안 순댓국을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광주에서 주로 먹었던 국밥이라곤 '나주곰탕', '장터국밥' 같은 것이 전부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접해 본 순댓국은 풍성한 내장과 순대의 녹진함과 국물의 꼬릿꼬릿한 향이 취향을 저격하는 음식이었다.
순댓국은 기본적으로 국민주류 소주와 참 잘 어울린다. 달콤쌉살한 소주를 한 잔 들이붓고 나서 입안에 국물을 적셔주면 다시 소주를 부른다. 든든한 돼지 내장과 순대를 함께 먹으면 소주로 인해 상할 위벽을 보호해 줄 테니 괜찮다(과학적 근거는 없다). 함께 나오는 깍두기나 양파, 고추를 곁들여 먹으면 느끼함은 사라지고, 식당에 따라 조금씩 다른 다대기를 넣으면 또 다른 음식이 된다. 개인적으로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대기를 넣기도 안 넣기도 하는데 일단 다대기가 기본적으로 들어간 순댓국집이라면 미리 빼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왜냐하면 순댓국 본연의 국물 맛을 보아야 이 집이 다시 올 집인지 아닌지가 판단되기 때문이다. 보통 부속고기와 국물에 자신(신선도나 맛)이 있는 집은 다대기를 별도로 주는 편이다(개인적인 생각). 그리고 칼칼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청양고추를 조금 집어넣어도 맛있고, 느끼함을 싫어하는 사람은 다진 마늘을 추가해도 좋다.
마치 순댓국 소믈리에처럼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대단한 미각을 가지진 않았다. 하지만 순댓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순댓국을 소울푸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함께 먹는 사람들 때문이다. 보통 가장 친한 사람들과 편하게 순댓국을 즐긴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나와 가까운 직원들과 주로 먹는 음식이었고(나중엔 또 순댓국이냐는 말을 들었지만), 전업주부가 된 지금도 내가 사는 동네를 찾아와 주는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자주 가는 단골 순댓국집으로 향한다. 순댓국을 먹으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 내 사는 이야기도 하다 보면 소주가 한 병, 두 병 늘어난다.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의 순댓국집은 내 엉덩이를 꽤나 붙잡고 있는 편이다.
순댓국에 대한 예찬을 하다 보니 과거 첫 직장에서 만난 후배가 떠 오른다. 20대 중반이었던 녀석은 종종 야근을 했고, 조용히 데리고 나가 함께 순댓국을 먹었다. 녀석은 몇 번 나와 함께 순댓국을 먹더니 대뜸 순댓국이 본인의 소울푸드라고 이야기했다.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한 후 녀석과 줄기차게 회사 앞 순댓국집을 찾았다. 당시 그 순댓국집에 거의 무명이던 범죄도시의 주인공 배우 마동석 님도 자주 찾았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지갑이 얇았던 두 청년의 신세한탄의 장소였기도 한 그곳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둘 다 이직 후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겨 버렸다. 부디 잘 지내고 있기를.
아버지와 관련한 순댓국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께서 서울에 모임이 있어 올라오셨다. 1차 모임이 끝나고 2차로 친한 분들과 함께 삼성동의 한 순댓국집에서 한 잔 더 나누시고 계셨다. 그때가 주말이었는데 선릉역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하던 나는 연락을 드리고 순댓국집을 방문했다. 친구분들께 인사를 드린 후 안주와 술을 몇 병 더 시켜드리고 결제를 하고 나왔는데 이후에 아버지 친구분께서는 나를 볼 때면 늘 그 이야기를 하신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부모란 그런 것 같다. 자식의 별 것 아닌 행동에도 쉽게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이쯤 되니 순댓국 좀 알고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좀 들어 유래를 찾아보았다. 일단 순대의 초기 형태는 고려시대 문헌에도 언급이 된다. 잡곡이나 채소, 피 등을 돼지 창자에 넣고 삶는 지금과 별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이는 몽골이나 중국 등지의 창자요리와 유사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한다. 순댓국은 조선 후기부터 근대에 들어서 본격화되었다. 순대를 삶은 물에 돼지머리고기, 내장 등을 함께 넣고 끓여낸 국물 음식이 서민들의 영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후로는 도살장에서 남은 돼지고기 부위와 내장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환경이었는데, 노점이나 시장을 중심으로 순대와 고기를 넣고 끓인 순댓국이 대중적으로 퍼졌다고 한다. 이 시기 해장국과 국밥문화와 맞물려 빠르게 정착을 할 수 있었다. 유래를 적다 보니 무엇보다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돼지의 위대함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순댓국집을 한 곳 소개하고 끝마치고 싶으나 너무 유명한 집들은 많이 알 것 같아 그냥 집 앞 단골집을 추천한다. 이수역 순댓국하면 가장 많이 소개되고 알려진 집은 남성집이다. 블루리본 스티커가 잔뜩 붙여진 순대가 들어가지 않아 특별한 순댓국집인데... 난 딱 한 번 가고 두 번 가지는 않았다. 음...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다. 바로 건너편에 20대 초반부터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찾고 있는 순댓국집이 있다. 마포집이다. 순댓국 말고도 뼈해장국, 감자탕도 판매하는 집인데 나는 주로 순댓국과 머리 고기, 편육을 주문해 먹는다. 특별함은 없지만 부족함도 없다. 같이 내어주는 한 두 가닥의 심심한 긴 겉절이도 맛있다. 그리고 최대장점이 하나 더 있다. 코로나 이후 사라진 24시간 영업. 이 집은 24시간 술꾼들을 반기며 문을 열어준다. 그렇다고 내가 새벽까지 술을 먹고 싶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그리고 여전히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절반 정도의 시간 동안 소위 내 사람들과 추억을 나눈 장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가보고 실망하셔도 저를 탓하지 마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