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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Sep 04. 2024

한 시간 걸리는 도장에서 운동하는 이유

운동은 가까운 곳에서 하는 게 짱이다. 그래야 꾸준히 갈 수 있다. 원래 운동하는 곳까지 가는 게 제일 힘든 일이거든. (아, 집을 나서는 게 제일 힘든 거던가.) 그런데도 집에서 한 시간 걸리는 도장에서 다시 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후배들에게 검도부활동이 대학생 때 1~2년 하고 마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다시 검도를 시작한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서울시 대학연맹전에 처음 나간 건 1학년 2학기인가 2학년 1학기인가 그랬지만 개인전 우승을 한 건 4학년이 되어서였다.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 죽도를 잡은 사람이 죽도를 들고 기본기를 익히고 호구를 쓰고 운동하는 법을 익히고 기본 기술을 익히는데 걸리는 절대적인 시간이 있다. 하물며 그 기본 기술을 이용해서 나와 같은 목적(너를 이기고 싶다)을 가진 사람에게 맞서서 점수를 딸 수 있는 수준이 되기까지는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한 건 말해 뭘 해.     


그런데 요즘 검도부 후배들은 한 달쯤 운동하고 나면 중간고사 기간이라 쉬고 또 한 달쯤 운동하고 나면 기말고사 기간이라 쉬고 그러고 나면 방학이라고 집에 내려가거나 운동을 안 나온다. 게다가 2학년 2학기에 임원진이 되어 호구식과 연무식을 한 번씩 치르고 나면 검도부 졸업이라고 하더라. 졸업한지 백만년 된, 그들 입장에서 까마득한 선배인 나로서는 가끔 연무식 할 때 가서 후배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들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2학년 2학기에서 3학년 1학기까지 임원진을 마치고 나면 ‘이제 홀가분하게 내 운동 해야지’하면서 번잡한 실무에서 벗어나 더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시기가 오고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시합에 나가서 입상을 노려볼 수 있을만큼 검도를 할 수 있게 되는데 2학년에 검도부를 졸업하다니. 무슨 말이야 얘들아.  

   

하지만 지금 대학을 다니는 후배에게 이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은 본인들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일텐데 초면에 선배랍시고 그런 잔소리를 한들 과연 얼마나 귀에 들어가겠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검도부가 계속 잘 되려면 내가 속한 동아리가 강한 팀이어야 한다. 내가 검도부 신입생이라고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맨날 같이 운동하던 언니들이 시합 나가면 뭐라도 트로피를 들고 와. 그러면 별 생각 없이 경기한다니까 보러 갔다가 한 라운드 한 라운드 경기를 거듭하면서 거뜬히 이기기도, 간신히 이기기도, 버티다 지기도 하는 언니들을 응원하다보면 갑자기 소속감과 팀에 대한 애정이 샘솟으면서 다음 세대는 우리가 이 언니들처럼 멋지게 이 명문팀의 명맥을 이어가야겠구나 하는 욕심과 열정이 생겨난다.     


그렇게 라떼는 우리 학교 동아리가 시합 나가면 색깔이 뭐가 됐든 트로피 하나는 들고 오는 강팀이었는데 이번에 대학검도 연맹전 구경을 가봤더니 우리 후배님들 전부 1차전에서 떨어졌는데 아직 실력이 호구 쓰고 자기 몸도 못 가누는 실정이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후배들이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오래 운동을 하는 선배, 자기 일상과 운동을 오래 함께 병행해나가는 선배를 본 적이 없다는 것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교내 운동 공간 부족 때문에 학교에서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하다는 점, 학교에서 운동할 때는 사범님이 안 계시다는 점, 사범님이 계신 도장에 오려면 교내 동아리인데 학교에서 한 시간이 걸려 부원들이 이동을 해야한다는 문제도 있을테고 기타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운동하는 선배가 되어서 계속 후배들 곁에서 얼쩡거리는 것밖에 없겠다 싶었던 거지. 와 첫번째 이유 긴 거 봐. 사실 이게 이유의 거의 모든 부분이기도 하니까.     


먼 도장까지 와서 운동하는 두 번째 이유를 굳이 찾아보자면 검도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칼을 맞춰 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내 검도 컨디션의 큰 부분을 좌지우지한다.      


대학시절에 방학이 되면 본가로 내려가 집 근처 도장에서 운동했던 적이 있다. 낮에는 고등학생 선수들과 운동하고 밤에는 도장 관원들과 운동을 했는데 꼭 한 명씩 있다. 도끼칼 쓰고 한 판이 될 공격이 아닌데 살짝만 닿아도 머리라고 손목이라고 우기는 아저씨들. 


내가 아주 실력이 월등해서 그런 사람들 아랑곳 않고 다 상대할 수 있으면 기분이 안 나쁠텐데(고등학생 선수들은 당연히 아무렇지 않아했다.) 그렇지도 못한 나는 그 비매너가 너무 기분이 나빠서 ‘아, 저 아저씨가 도장을 좀 옮겼으면’ ‘아, 저 아저씨가 내일은 안 나왔으면’ ‘아, 저 아저씨랑 대련은 안 했으면’하는 생각을 운동하는 날마다 했다.     


그러니 동네 도장에 가도 그런 관원들이 있을 가능성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테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멀리 가더라도 짜증나는 고인물이 있는 곳보다는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가르쳐 주면 가르쳐주는 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후배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결론을 최종적으로 내리게 된 거였다.     


후배들만 보고 사범님(=동아리 선배님)이 계시는 도장으로 왔는데 요즘 내가 엄청 호강을 하고 있다. 도장에는 한국에 몇십 분 계시지도 않은 8단 선생님이 계시고, 주로 운동을 지도하시는 7단 사범님에, 같이 운동하는 6단 사범님 두 분이 계시다. 다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검도를 시작한 내가 가진 다방면의 부족함들을 메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초단을 이학년 때쯤 땄을 테고 2단을 3학년 때 땄을까. 그런 핏덩이 학부생일 때는 되게 잘하는 선배인 척하는 포지션이었는데 20년 후에 다시 돌아온 검도장에서 고쳐야 될 거 제일 많은 어린양이 되어서 운동을 하니 얼마나 마음이 가벼운지 모른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운동할 시간에 도장에 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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