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시리즈
해마다 엄마 생신 즈음이면 오빠네와 함께 여행을 하곤 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조카가 고3이 되면서 못간지가 어언 2년이 되어간다.
뭔가를 하려고 날짜를 잡을 땐 빠른 날이 좋은 날인 사람이라 아이들까지 가족 전원 코로나 백신을 맞은 후 경주 여행을 잡았다.
놀랍게도 아빠는 엄마의 생신 기념 여행에 한 번도 합류하신 적이 없다. 방 안에 누워서 세상 모든 것을 섭렵하고 이불 굴 속에서 도를 통하사, 직접 눈으로 보겠다고 돌아다니며 돈 쓰고 시간 쓰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심히 못마땅해 하시는 아부지에게 같이 가시자고 섣불리 권했다가는 엄마도 여행을 못 가시는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코로나 상황에 2년째 지치지도 않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시는지라 이번 여행은 아빠에게는 떠나는 날까지 비밀이었다. 아빠는 계획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을 중요시하는 성향이라 다소 충동적이고 자유로운 엄마의 행동 패턴이 못마땅한데 엄마 입장에서는 계획이 있다한들 미리 얘기해봤자 좋은 얘기가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지라 아빠가 좋아하시는 예측 가능성을 주고 싶고, 줄 수 있어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시도를 해보았으나 끝내 변하지 않는 아빠에 대한 엄마의 처방은 '뺄 0 빼고!'(한 자인 점 주의)
나도 방탄 콘서트 보러 미국을 가려고 결심하고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면서 아빠에게는 마지막까지 말씀드리지 않았다. 내 부재를 아빠에게는 알리지 마~라 모드로 아빠 호적에서 파일 각오하고 가는 거였는데 생각해보니 이미 호적은 파였더라고.
그리고 내가 새로 들어간 호적의 그 분은 내가 하겠다는 일에 언제나 선선히 그래,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하는 분. (내가 하겠다는 건 뭐든 하라고 하면서 돈은 한 번도 주지 않는 아빠와 내가 하겠다는 걸 매번 말리면서 결국에 돈을 대주는 아빠, 여러분의 선택은?)
나의 미국행을 아빠에게 알리지 마라 프로젝트는 출발 며칠 전에 엄마가 아빠랑 같이 차 타고 가시면서 '니가 언제 가드라? 언제 오드라?' 하셔서 뽀록이 났다. 작은 일에는 깐깐하시지만 큰 일이 벌어지면 쿨하게 넘어가시는 아빠의 성향은 아직 그대로셔서 내가 세워두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실행되지 않고 넘어갔다. 여행 간 동안 10일 자가격리 지침이 내려지자 남편에게 전화해서 아이들 호텔에 보내고 내가 집에서 자가격리하게 하라고 하셨다지. 저에게는 더 좋은 대안이 있습니다. 아부지.
아빠는 엄마와 우리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날 안부 전화를 한 오빠에게 하나 밖에 없는 딸래미가 아빠한테는 여행가자는 소리도 안 한다고 앓는 소리를 하셨다고 한다. 아빠에게 여행 같이 가시자고 한다고 나설리가 없으시다는 건 오빠도 나도 알고 있는 게 함정.
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우리 집에 대입해보면 내가 아빠고 남편이 엄마다. 엄마가 아빠 때문에 힘드신 얘기, 아빠가 엄마 때문에 이해 안 되는 얘기를 듣다보면 남편과 내가 보인다.
저 사람한테 말 해봤자 좋은 얘기 안 나오니까 말을 말아야지.
저 사람은 항상 충동적이어서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단속해야해.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정당하고 일리있는 전개다.
다만 그렇게 각자가 정당하다며 각자의 방향으로 가버리니 악순환일 뿐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아이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 있다.
엄마는 내가 PC방 간다고 그러면 항상 혼만 내니까 숨겨야지.
저 녀석이 이렇게 규칙적으로 저녁마다 운동을 하러 간다고?
뭔가 냄새가 나는데...
이렇게 숨기고 파헤치는 관계가 되니 아이와의 접점에서 모든 것이 삐걱거렸다.
믿음은 선불이라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다.
아이가 PC방 가는 걸 매번 환영하고 허락할 수는 없지만 갈 때는 간다고 사실대로 말해도 엄마가 이해해 준다는 믿음, 아 됐고 가지마,라고 할 사람은 아니라는 신뢰 정도는 있는 관계였으면 했다.
지금 와서 아빠를 바꿀 순 없지만 아빠를 보고 나를 바꾸는 노력은 해보자. 아빠 없는 가을 여행 사진을 정리하다 쓰는 역지사지 시리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