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주인공들이 보는 미드 <길모어 걸스>
여행하는 기분으로 볼 수 있는 드라마, 영화에는 범죄 스릴러가 많다. <본 아이덴티티>로 시작한, 무한대 미드 투어의 동선은 유럽 출신의 주인공이 대서양을 오가는 스케일의 <밀레니엄>, <오펀블랙> 등으로 이어졌다.
<화이트 칼라>와 같이 장거리 투어는 드물어도 뉴욕으로 충만하거나, <위기의 주부들>처럼 미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가상의 마을을 거쳐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나려고 했었다. 음, 어쩌면 지금 보고 있는 <카르멘 샌디에고>가 그 계획을 이어받을지도 모르겠다.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은 <기묘한 이야기>에서 마이클 역을 맡았던 핀 울프하드의 목소리 연기로 세계 여행정보를 알차게 브리핑해주는 꿀템이다. 샌디에고의 출장 지역은 <앨리어스> 주인공 시드니와 흡사하다. 둘다 이름이 도시명이기도 하다.
<킬링 이브>를 만나서 <앨리어스>로 회귀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나의 실제 여행, 무한대 미국일주처럼 뫼비우스의 띠를 달리는 '시카고'발 <설국열차>가 2023년의 첫 시청작이 됐다. 여기에 아껴둔 디스토피아 명작인 <핸드메이즈 테일>과 <워킹데드>를 더해 미드 투어를 일단락하려고 했다.
<워킹데드> 시즌 11의 파트 3를 마저 보려고 열었다가 실망해서, 미드 투어 시즌 1은 <설국열차>를 마지막으로 조기 완결할 예정이다. 리뷰를 취소한 작품들도 있지만 추가한 작품도 있어서, 결과적으로 처음 기획과 비슷하게 22부작이 됐다.
<볼드타입>과 <브루클린 나인-나인> 등 스릴러는 아니지만 뉴욕 출신이라는 이유로 끼어든 작품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 충동적으로 애증의 <길모어 걸스>를 꺼내들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질 작품이 알렉시스 브레델을 공유하는 <핸드메이즈 테일>인데, 이것만 봐도 우주가 밀어주는 것 아니겠냐며.
친구 같은 로리나 레인보다 <킬링 이브>의 킬러 빌라넬을 더 좋아했지만, 기존의 원고들을 브런치에서 퇴고하는 과정에서 유색인종 캐릭터에 대한 논의가 점점 거대해지는 중이었고 한국계 배우의 레전드인 산드라 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길모어 걸스>에서 여신처럼 모셔진 산드라 오의 사진이 등장하는 (머릿속에는 강하게 남아있던) 장면을 누군가가 캡쳐(!)한 사진을 발견했기에 산드라 오는 작품 외적인 언급으로도 충분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브런치 포스팅의 커버 사진은 일부러 인스타 썸네일과 다른 것을 고르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뜬금없이 이미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커버에도 (인스타에는 없는) 산드라 오가 등장한다. (응?) 이번 작품 <길모어 걸스>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산드라 오는 그 시절에도 레전드였고 지금도 그렇다.
최근에 완주했고 그렇기에 지금 보면 당연히 아쉬운 점이 많은 <길모어 걸스>는 그럼에도 시대를 꽤 앞서갔다. 모든 에피소드에 출연하는 캐릭터는 길모어 가족인 로렐라이 모녀와 조부모, 루크와 미셸(수키는 한번 쉬었다.), 그리고 '레인'이다.
그러니까 레인은 루크(로렐라이의 예비 남편)나 미셸(로렐라이의 평생 사업파트너)처럼 길모어 집안과 뗄 수 없는 길모어 아닌 길모어 사람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것도 어쩌면 진주인공.
패리스는 시즌 내내 로리와 같은 학교를 다니지만, 레인은 유치원부터 사립학교로 전학가기 전까지 로리와 같은 학교를 다녔을 것이고 로리가 다른 지역의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음에도 엄마 로렐라이가 운명적으로 소속된, 가상의 마을 '스타즈 할로우'의 고정멤버(엄마랑 싸웠을때 로리의 숙소)로 모든 에피소드를 완주한다. 예일대 동기 패리스는 로리 없이 등장하는 장면이 거의 없지만, 고향 친구 레인은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는 주연이다.
<길모어 걸스>는 레인 가족을 통해 한국 문화, 한국계 미국인의 세대별 정서와 성격 차이 등 다양한 한국인 캐릭터를 보여주려고 했다. 주연 레인의 서사를 통해 친구나 친척으로 한국계 배우가 여러명 출연한다. <로스트>, <센스 8>, <킬링 이브>와 다르게 한국인이 한국인처럼(!) 보였다.
다만 정작 레인은 케이코 아제나, 레인의 엄마는 에밀리 쿠로다라는 일본계 배우가 연기했다. 당시에도 한국계 이민자는 이미 많았고 산드라 오라는 괜찮은 표상이 존재했음에도 주연급 배우를 한국인으로 캐스팅하기 어려웠던 문화적 공백기였던 것이다.
지금처럼 남아시아, 남미 등 다양한 유색인 캐릭터가 더 많이 활약하고 길모어처럼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한 가족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중에서도 <김씨네 편의점>과 같이 전원 한국인(또는 인도인, 이란인 등등)인 드라마가 가능해진 시대로 돌아와서 되돌아보면 안타까운 한편 감사하다.
일본계 배우가 연기한 <길모어 걸스>의 김씨 모녀와 같은 시도들이 이어져서 더 많은 유색인종 배우들에게 커리어를 제공했을 것이 아닌가. 복수에 인생을 바친 여성의 복수드라마 <리벤지>의 다케다는 주인공 에밀리에게 무술과 복수를 전수한다.
<카르멘 샌디에고>의 섀도 역시 카르멘의 스승이자 비공식적인 수양부 역할도 한다.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로 섀도 역 뿐만 아니라 일본계 배우가 상당수 출연한다. <길모어 걸스>의 미세스 김 역할을 맡은 에밀리 쿠로다는 한국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목소리 배우로 출연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