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프랑스 화가 발튀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삽화를 그린 프랑스 화가
발튀스(Balthus,1908-2001)를 만날 때가 됐다. 발타자르 클로소스키 드 롤라(Balthazar Klossowski de Rola), 일명 발튀스는 생전에 루브르 컬렉션에 작품을 등록한 유일한 화가이며,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관장을 지냈다. 발튀스의 팬이었던 알베르 카뮈가 전시 도록의 서문도 썼다고 한다.
워낙 기묘한 발튀스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기타레슨, 1934>에는 싸우는 것인지 사랑을 나누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 묘사됐다. 음악실에서 음악선생님으로 보이는, 성인 여성이 기타를 연주하는 듯한, 기묘한 체위로 어린 소녀와 함께 서로의 성감대를 붙들고(!) 있다. 소녀의 하체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시선강탈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작이다. 그런데 이 그림만 소녀의 누드를 그린 것은 아니다.
<벽난로 앞 누드, 1955>는 이제 막 사춘기에 진입한 (11세 정도) 소녀의 옆모습 나체화다. 발튀스라는 이름은 전혀 몰랐을때도 그 화풍을 기억할 수 밖에 없었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직촬 사진 중에 이 작품은 없었다. 조사해보니 다른 작품들과 같은 전시실에 있는 듯. 일단 화풍(약간 마네)이 다르고 너무 어린 청소년(너무 자란 어린이)의 누드라서 보고도 못 본 척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에로틱한 권태를 표현하기엔 모델이 너무 어려서 난감한 <꿈꾸는 떼레>보다는 그나마 봐줄만한, 그냥 <떼레> 역시 같은 전시실에 있었겠지만 놓쳤다.
요상하지만 그럼에도 수용가능한 범위에 있던 <꿈꾸는 떼레>와 함께 촬영해둔 작품들은 수묵담채화느낌도 있는 <렐리아 카타니>와 <피에르 마티스>인데, 이 그림들이 다 발튀스였을 줄이야. 잔디와 상의에만 컬러가 들어간, 창백한 얼굴의 여인 렐리아는 누구인가? 피에르가 앙리 마티스의 차남이라는 것은 조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핀터레스트 칭찬해.
발튀스의 직촬 작품에서 읽어낸 화풍은 도발적이고 독특한 포즈와 권태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표정, 만화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배경 묘사(비둘기, 돔 위의 조각, 피에르의 양말) 등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마저 찾아보니 더욱 요상한 포즈로 창가에 기대어 있거나 소파에 누운 여성들이 많았고 조명이 충분할 경우에는 인테리어 묘사가 더욱 섬세했다. 인물의 행동, 태도, 심리를 꿰뚫어보는 자기만의 관점-통찰력이 있는 한편 배경에 있어서는 실제 조명과 디테일에 굉장히 충실한 타입.
그의 시그니처가 된 난해한 포즈의 여성 초상화 중에서 특히 12세 전후 소녀의 누드가 돋보인다. 발튀스에 대한 호평을 꺼리는 평론가나 관람객이 많았을 것이다. 본인은 당연히 아니라고(부인했다기 보다는 그저 나는 보이는 대로 그렸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소녀 누드를 아동 포르노라고 읽는 사람도 많았다. 평론가 집안에서 성장한 탁월한 감각 및 평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더해 오랜 활동 기간의 내공이 담겨있는 정물화, 풍경화, 야외 단체 초상화를 감상하면 발튀스를 보다 냉정하게 관람할 수 있다.
<호안 미로와 그의 딸 돌로레스>도 발튀스의 그림에 출연했다. 이 부녀가 취한 포즈는 다른 남매, 다른 부녀의 그림에도 등장하는데, 그 중 원조교제를 암시하는 듯한 작품(약간 드가)도 있다. 이런 작품은 보여주기도 민망하지만 나도 소화가 어렵다. 다른 화가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벨튀스를 더 많이 알게되면 그때 다시 감상해보려고 한다.
<페이션스>, 즉 인내심이라는 작품은 불굴의 의지를 포즈로 형상화한 초상화다. 영화나 사진 이전의 그림에서는 보기 힘든 스타일. 발튀스는 그 시대의 포토샵과 같은 미화 처리가 된 초상화에 질렸을지도 모르겠다. 별 기술이 없던 시절, 전문가들에게 메이크업, 헤어, 촬영과 보정을 받은 사진을 주문했고 우연의 일치로 <소묘의 기초>라는 교양 수업에서 그 사진을 모델삼아 초상화, 그러니까 자화상을 그렸더니 '미화법'이라고 놀리신 교수님이 생각난다.
르누아르와 사전트가 그린 여성들도 스드메를 갖추고 화가의 붓터치로 포토샵 효과를 누리기 위해 초상화를 주문했을 것 아닌가. 프로 분장사와 패션 창업을 거쳐 스드메 셀프-화보, 웨딩, 뭐든- 촬영이 가능해진 지금은 어떤 모델이든 그렇게 스타일링해서 초상화에 쓸 사진을 마련할 수 있다. 그림을 사전트처럼 그릴 순 없지만 그건 인공지능이 맡을테니.
에드워드 호퍼의 스승인 로버트 헨리가 속해있던 애시캔 학파의 도시 리얼리즘을 인물화에 적용하면 발튀스일까? 에드워드의 인물은 텅빈 공간 속 바비인형(조 호퍼를 패션모델처럼 길-게 늘린 버전)으로 존재하지만 발튀스의 인물은 캔버스를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한 권태(!)를 표출하는 지치고 망가진 인형으로 존재한다. 이런 모순이 가능하다니.
<드로잉 룸>은 화실이라는 뜻도 있지만 서양 건축에서 응접실이나 라운지, 또는 훗날 스튜디오로 불리게 될 그런 류의 개방적인 공간이다. 엄밀히 말하면 또다른 건축용어인 '스튜디오'를 콩글리시로 환원하면 원룸이다. 화장실 이외의 모든 공간이 오픈된 아파트를 스튜디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다목적 화실에서는 <페이션스>에 등장하는 언니처럼 인내심을 발휘해 그림을 그리는 소녀 1도 있지만, 라운지에서 뒹굴거리는 소녀 2도 있다.
창 밖으로 나가려는 것인지, 창틀에 기대어 있는 것인지. 포즈와 표정의 불일치로 어리둥절함을 선사하는, 창가의 <레이디 Abdy>부터 점점 바닥으로 무너져내리는 여성들의 포즈가 어쩐지 불길하다. 급기야 등산에 따라간 소녀 1은 기지개를 켜는 소녀 2 옆에 뻗어있다. 등산처럼 개인의 체력과 의지력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야외운동에 임하는 각자의 심리를 이렇게 형상화할 수도 있다니.
이쯤되면 발튀스의 천재성을 인정하게 된다. 게다가 관객을 배려한 것일까? 두 소녀의 포즈를 직관적으로 캐치하지 못할까봐-혹은 보호자가 필요해서 동행한-남성 인물과 다른 친구들은 서 있는 위치의 차이로 등산 실력을 증명하고 있다.
발튀스가 <기타레슨>을 완성한 1934년부터 <페이션스> 등을 그린 1943년 사이에 시그니처 작품이 가장 많이 존재한다. 그 후에도 요상한 포즈로 누워있는 소녀들의, 누드를 포함한 초상화에서 관능적 권태가 반복되지만 점점 작품활동의 주기가 길어진다. 그러다 <벽난로 앞 누드>처럼 관능적 권태가 사라진 그나마 무난한 포즈의 소녀 누드로 바뀐다. 그 해에도 이상한 누드와 기묘한 초상화가 있었지만.
작품활동에 몰입할 수 없었거나 작품이 소실된 기간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덧 그는 전쟁이 지나간 후 황량해진 거리의 풍경을 그렸다. 배경색은 그의 초창기 풍경화보다 조금 탁해졌지만, 작품의 분위기나 인물, 동물의 움직임에서 큰 차이가 느껴진다. 주로 실내초상화를 그렸으나 인물과 배경에 모든 뉘앙스를 녹여내는 발튀스의 능력은 시대적 분위기, 도시의 활력도 풍경 한 장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