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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pr 04. 2023

나이트 클럽 전문 단체 초상화의 달인

시카고 흑인화가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

뮤지컬 영화 <시카고>의 빅 팬이다. <시카고>를 뮤지컬로도 봤어야 했다. 대신 <시카고>만큼 좋아하는 <라이온 킹> 인터내셔널 투어를 서울에서 보고, 같은 해에 시카고와 뉴욕에 갔다. 그때는 일방향의 공연보다 <시카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런 클럽에서 식사와 함께 연주를 관람하고 싶었다. 대리만족이 아닌 진짜 만족을 하기 위해 온 거니까.


그런데 <시카고>는 시카고에서 봐야 하나? 뮤지컬이니까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봐야 하나? 내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이 또 <시카고> 인터내셔널 투어가 한국에 왔다. 오자마자 보고 싶었지만 일정이 뒤엉켜서 서로 다른 두 곳에서 열리는 라울 뒤피 전시 티켓들도 대기중인 마당에 날짜가 지정된 국제도서전까지 다가오는 중이다. 우선 예매한 스케줄을 해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뮤지컬을 다시 검색할 수 있기를.


뉴욕 또는 런던에서 본다던 <라이온 킹>은 시카고 여행 전 같은 해에 봤으니, 나는 스픽이지(암호를 대고 들어가야하는 비밀술집)와 회전하는 스카이라운지, 뉴욕 드라마 덕후들의 성지인 <사라배스> 테라스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야경을 감상했다. 모두가 공연하는 도시에서 공연하는 모두를 봤다. 남은 사진과 영상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게 현생이니까. 




귀국 다음 해에는 <캣츠>도 인터내셔널 투어를 한다고 해서 예매했다가 취소했다. 그때만 해도 방역수칙이 내려가면 바로 약속을 잡았다가, 취소하는 일이 빈번했다. 어느 순간 약속을 잘 안 잡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이유가 더 크다. 지킬 자신이 없는데 지키려고 애써야 하는 약속은 안 잡게 된다. 정말 가고 싶은 전시와 북토크, 정말 보고 싶은 친구의 결혼식 외에는 생업이나 내가 출연하는 공연이 거의 전부였다.


아이폰이 기록한 일일 평균 산책거리는 2019년에 2.4km, 2020년에 0.77km, 2021년에 1.4km, 2022년과 2023년에 1.1km다. 여행 기간 평균은 9km인데 그 벼락치기가 아니었다면 2019년에 2km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에도 걷기의 성수기와 비수기는 뚜렷했던 편이다.) 하지만 면허증도 없고 평생 운전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데 1년 내내 하루 1km도 걷지 않았다는 것은 체력저하, 혹은 무기력증을 의미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라이온 킹> 전후로 공연 관람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공연에 '출연'하는 것 이상으로 컨디션을 관리해야 '관람'도 가능하다. 출연자는 출연 전에도 긴장감과 희열이 있지만 관람자는 관람을 시작해야만 그런 바이브를 전달받는다. 오랜 칩거 후에는 부담스러운 일정이다. 혼자 공연장에 간다면, 더더욱 좀비처럼 하고 갈 수 없으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달하기 직전에 관람한 <레베카> 이후로 마음 편히(?) 내돈내산한 공연은 아직 없다. 그래도 <시카고>는 볼 수 있기를.


마스크를 써야 했던 댄스 클럽도 내가 공연에 '출연'하는 날이나, 정말 오랜만에 저 깊숙한 곳에서 세포가 춤을 추는 날(불과 1년 전에도 그랬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두 번째 감염 이후로 춤 세포가 전멸됨)이 아니면 잘 안 가게 된다. 뮤지컬보다는 밴드 공연이 있는 재즈 클럽, 그보다는 그냥 스피커가 빵빵한 댄스 클럽이 내 취향이었는데. 모틀리의 그림 속 클럽 같은 곳이.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1891-1981)는 시카고와 뉴올리언스, 파리의 댄스 클럽 실내 풍경을 역동적으로 그렸다. 할렘 르네상스라 불리던, 할렘의 흑인문화가 폭발하던 시기이자 일명 '개츠비 시대'에 활동한 그는 흑인 최초로 시카고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흑인 최초로 구겐하임 펠로십을 수상했다.


모틀리는 흑인 혼혈 여성들의 초상화도 그렸다. 노예로 태어난 자신의 할머니를 비롯한 주변의 여성들과 지중해 여러 민족의 유전자가 혼재하는 남유럽과 크리올 여성들의 초상화. 특정인이 아닌 그녀들의 초상화에 옥토룬(Octoroon)이라는 제목을 부여했다. 우리 모두는 8분의 1의 흑인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는 그러하다.





국내 포털의 지식백과에 등재된 화가가 아니라서 시카고 미술관 및 휘트니 미술관(에드워드 호퍼의 모든 유작이 기증된 곳. 현 위치로 이전한 직후의 첫 특별전이 모틀리였다고 함)의 전시 리뷰를 한 블로그를 통해 입수한 정보는 이 정도. 구글의 인물검색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시카고 미대 졸업년도와 생몰년도 및 지역, 직계 가족의 이름이다. 위키피디아에 충분한 정보가 있으나 영어로 읽기에는 분량이 좀 많고, 자동번역된 한글판은 매끄럽지 못하다.


그렇다면 화가에 대한 호기심이 읽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감수할 정도로 커야하는데, 일단 위키피디아를 저장하고 다시 국내 포털에 검색을 했더니 가장 상위에 있으면서 가장 최근에 발행된 글이 지금 편집 중인 이 글의 브런치 원문이다. 이 글의 초고를 작성할 당시에 검색한 정보 이상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 나름 얼리어답터라는 자부심을 자극하는,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의 (원래 있던 책이지만, 처음 번역된) 신간을 읽으면서 흑인 혼혈 여성의 초상과 그녀들의 밤문화를 그렸던 아치볼드 모틀리의 위키피디아 영어판을 정주행하고, 그의 전 작품 투어를 다시 해야겠다. 서평도 그렇지만 특히 미술 감상의 경우, 연관 작품으로 감상 경로를 따라가다가 심화 학습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다. 어쨌든 한국어로 된, 모틀리의 이야기는 지금 이 글이 가장 상세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확장판을 다시 예고한다.    


역시 영어로 봐야 하는 미술 포털 웹사이트 위키아트에서 검색한, 연대별 작품 순서로 보아 1920년대 중반에는 초상화 위주로 그리던 모틀리가 어느 날 파티 분위기의 실내풍경화를 시도했다. 그 주제를 반복해서 연구하여 자신의 시그니처로 삼았고, 어느 시점에서 그는 파티풍경화의 달인으로 거듭난다. 특히 1929년 파리에서 새로운 역동적 분위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 <블루스>라는 작품은 바로 그 해에 빨아들인 에너지가 응집된 곳이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다시 초상화도 그렸지만 미국 재즈 시대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화폭에 담았다. 클럽과 야외 파티, 쇼걸의 분장실, 축제 등을 배경으로 컬러풀한 단체 초상화를 남겼다. 그의 테크닉이 최고조에 달하는 1930년대를 집약한 작품이 1943년작 <나이트라이프>다. 아무래도 시카고 미대 출신이다보니 대표작 두 점이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 것 같다.


그림만 보고도 이미 빨려 들어갔지만 다름 아닌 시카고를 대표하는 흑인 화가의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갔다. 게다가 시카고만큼 매력적이고, 다녀온 사람의 자부심을 빵빵하게 채워주는 뉴올리언스가 그의 고향이라고 한다. 리글리 블론드 리즈 위더스푼도 뉴올리언스 출신이라던데. 모틀리는 <나이트라이프> 이후로 작품 활동이 뜸해졌지만 푸른색 배경의 정치적인 작품이 몇 점 남아있다. 이전의 작품들이 다소 밝은 분위기의 랩이라면 후기의 작품들, 특히 마지막 작품은 아주 정제된 기법으로 연출한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영어문화권의 시와 그 형식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시에 비유한 것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림만 봐도 '말을 아끼는' 것이 느껴져서 달리 설명하자니 언어의 과잉이 될 것 같다. 흑인 작가들의 소설에서 랩을 느꼈던 적은 있지만 흑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백인 여성의 소설에 비해, 흑인 작가의 소설은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다. 올해 새로 구입했거나 구입 예정인 책은 가급적 비영어권 작가 또는 영어권일 경우 유색인종 작가의 문학작품이다. 한국인의 인종정체성은 복합적인데 우리의 이중성을 강화하는 독서 경향이 바로 한국인과 북반구 백인 작가 중심의 레퍼토리다. 심지어 그 목록에서도, 미국에서는 국민 작가인 해리엇 비처 스토나 하퍼 리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 드라마 인종 구성에 호기심이 많(을 수 밖에 없)던 덕분에, 영어 원서로 거의 처음 읽었던 미국 작가가 해리엇 비처 스토와 하퍼 리였다. 백인 작가와 백인 독자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이 정작 유색 인종인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흑인 해방에 대한 문제 의식을 직관하기 어렵고, 그저 백인들의 무시에 속으로만 분노하면서 다른 유색 인종들과 연대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활약하면서 교포들의 작품이 역수입 되고 우리의 복합적인 인종정체성을 내국인들도 학습하는 추세다.    





시카고에서 만난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의 작품 두 점과 어딘가에서 마주쳤으나 미처 수집하지 못한 할머니의 초상화까지 보고도 이름을 검색하기 전까지 그가 흑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름을 검색하면 인종정체성이 드러난다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와 벨 훅스의 경우 워낙 선구자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자. 파티풍경화만 보고는 모틀리가 의도한 대로 그저 밝고 역동적인 밤문화의 대변인이라고 인식했다. 그 시절 백인들은 그림 속의 흑인들을 알아봤을까? 


지금은 미드의 주인공을 캐스팅할 때도, 주제가 인종과 관련된 유색인종 가족이 등장하거나 중립적인 작품이라면 혼혈 또는 입양 가족을 설정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현대 유럽의 인종 구성을 더하면 유럽 사극이나 판타지의 인종 구성도 달라져야 한다. 관련 이슈는 <샬럿 왕비>와 함께 다시 보게 되겠지만, 지난 5월의 <인어공주> 논란은 상당히 안타깝다.


시카고 미술관에 방문했을 당시 조르주 쇠라, 에드워드 호퍼, 그랜트 우드의 대표작이 시선강탈을 해서 시카고와 시카고 미술관을 대표하는 흑인 화가의 존재를 꿈에도 몰랐다. 시카고 자체는 <시카고>의 캐서린 제타 존스와 <다이버전트>의 케이트 윈슬렛을 통해 관심을 가졌으나, 가상의 인물일지라도 '시카고 출신'으로 뇌리에 박힌 사람은 <크리미널 마인드>의 데릭 모건이었는데. 시카고에 도착해서 백인들과 흑인들의 긴장감을 감지하고, 트럼프 정권 시절 입국한 유색인 여성이라 꽃뱀 스캔을 당했는데. 그럼에도 한국인 관광객이 생각보다 참 많았고, 시카고 관광업계 종사자들은 참 친절했다. 그래서 또 생각 없이,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 유럽 화가들을 열심히 감상했다. 그럼에도 파티풍경화는 다른 의미로 시선강탈을 했다. 처음 보는 그림이지만 그림 속 풍경은 너무 익숙하니까. 유명해서 좋아하는 건지, 다들 좋아해서 유명한 건지 조금 모호한 작품들과 다른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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