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딘 에바리스토의 부커상 수상작 <소녀, 여자, 다른사람들>
이 책은 원서 기준으로 450 페이지에 걸친 영국 흑인여성의 이야기다. 등장인물의 아이덴티티가 서스펜스이자, 그들 생애의 주요 사건만을 언급하고 지나가는데도 무수한 -ism과 성정체성, '흑인여성'으로 범주화하기 미안할 정도로-그럼에도 이 범주임이 중요하다.-다양한 그녀들의 사회적 지위와 삶의 무게를 읽어낼 수 있다.
같은 해, 같은 부커상을 수상했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에서 분노하고 오열한 그 모드 그대로를 소환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극사실주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러니까 현실속의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며 현타를 맞고 시작해야 한다. (누가봐도 익명 실화다.) 레즈비언 가스라이팅 피해자인 도미니크를 읽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이성애자 여성인 캐럴의 상처를 들춰내야 했다.
이 찜찜하지만 빠져드는 스토리는 저자의 탁월한 필력에 힘을 얻는다. 챕터 2와 챕터 3의 인물들은 퀴어 커뮤니티의 '지인'일 뿐 스스로를 '옷장 속 호모포비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평범한 여성들이다. (옷장 속 호모섹슈얼&퀴어가 옷장에서 나오는 행위를 '커밍아웃'이라고 한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들의 사연은 끔찍하면서도 평범(들어봄직)해서 더 끔찍하다. 흑인 혼혈이고 사진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버나딘 에바리스토 교수는 2000년대생이나 쓸법한 슬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영문학자가 쓰는 고급어휘의 풍부함은 단지 쿨함을 넘어선다. 때로는 미국 동부의 허세 가득한 엘리트보다 (당연히) 더 시니컬하고, 그런 한편 유럽이라 왠지 낭만적인 런던과 영국 곳곳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덤.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고 여성(과 퀴어)들이 사는 곳은 더 비슷해서 소름끼친다. 작품에 등장하는 퀴어 커뮤니티는 원제가 <Sex Education>인, 영국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를 연상시킨다. 아메리칸 스탠다드와 슈퍼우먼 컴플렉스가 단단한 미국사회는 인종, 젠더, 젠더 불일치성에 따라 각자의 유리천장과 싸워야 한다. 당연하게도 영국이 그보다 덜 하진 않다. 다른 영드 <브리저튼>이 촉발한 다문화적 역사의 재구성을 보라. 한국사람들이 '어색하다'고 말할 정도면(그보다 더한 혐오발언이 더 많겠지만) 영국사람들은 어땠을까. 인종주의자들의 반응은 한국 꼰대들의 핼러윈포비아처럼, 알기 두렵다.
다만 영국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더 많이 진행될 수 있는 사회, 초로의 교수님이 10대들과 공감할 수 있는(있기를!) 랩에 가까운 소설을 쓰고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하는 사회,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빛과 그림자를 대놓고 언급할 수 있는 사회다. 상대적으로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정권교체, 정보의 불균형 등으로 우리 나라와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마치 20세기와 19세기&21세기가 동거하는 느낌.
글쓰는 여성의 역사에서 공용어를 쓰는 영국언니들의 존재감은 크다. 따라서 (내맘대로 일반화한) 그녀들의 '자부심'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오스틴과 브론테, 울프 언니 본인들이 나르시스트는 아니어도(물론 이들 역시 다락방의 남미언니에게 까여도 할 말이 없겠지만) 현대의 영국문학을 백인여성이 대표할 필요는 1도 없다. 이런 곳에서 흑인여성이 어떻게 살아왔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결국 지들도 이민자면서, 남미와 아시아의 이민자를 박해하는 미국의 백인들보다 영국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앵글로색슨 코카시안이 영국 땅에 스며든 유색인종을 반길 리 없다. 동포인 조선족마저도 차별하는 한국 사람들보다 더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영국 백인들에게는 식민지 시대를 호령한만큼 모든 차별에 책임져야하는 숙명이 있다.
서유럽에서 백인으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자들의 숙명. 프랑스에서 유색인종이 프랑스어를 하면, 그 유식함(?)에 놀라기보다는 '식민지 출신인가 봄'이라는 편견이 따른다고 한다. 식민지 경험을 극복하고(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는 해방된지 38년 밖에 되지 않는 신생국가였다.) 유럽문화까지 도장깨기하는 (마침내 영어를 정복한) 한국인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영국언니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글에는, 안전한 클리셰가 모여있는 미국언니들의 조금 흔한 소설과는 다른 풍미가 있다. 지적으로 안정된 어휘에 아프리칸 바이브가 더해진 래퍼 스타일 사설시조는 (번역서로 봐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원문을 추천해본다. 영어를 읽을만큼 읽어봤다면 더 좋겠지만, 노래가사라고 생각하고 그냥 읽어도 흐름을 타게 될 것이다.
what it was like when white men opened
doors or gave up their seats on public
transport for white women
(which was sexist), but not for them
(which was racist) -13p, Amma
feminism is so herd-like,
even being a woman is passé these days,
I reckon we're all going to be non-binary
in the future, neither male nor female,
which are gendered performances anyway...
-39p, Amma
she's Mum's emotional caretaker,
always has been, always will be it's
the burden of being an only child,
especially a girl -50p, Yazz
how can you not be when your mum's
a polyamorous lesbian and your father's
a gay narcissist, and you were shunted
between both their homes and dumped
with various godparents while your
parents pursued their careers?
...that's her prerogative -52p, Yazz
she always felt the need to speak up
when it was implied that black Brits
were inferior to African-Americans or
Africans or West Indians -82p, Dominique
she wondered what she was doing with
someone who wanted to micro-manage
her entire life, including her mind
-94p, Dominique
but the really posh ones were
the loudest and the most confident
and they were the only voices she heard
-131p, Carole
With their PhD and espousing their
show-off 'constructivist' teaching theories
all ideology and no experience-wankers
-239p, Shirley
people was that rude and ignorant
back then, they spoke their mind and
didn't care that they hurt you because
there was no anti-discrimination laws to
stop them -261,262p, Winsome
it blew her mind to hear how America's
educated housewives were supposed to be
satisfied with their roles as mothers
and homemakers, but who were, in reality,
simmering with a discontent they were
not allowed to express, all those poor
women imprisoned inside their suburban
houses and consigned to cooking and
cleaning instead of discovering a cure for
blindness or something equally as noble
-288p, Penelope
she admitted she'd lost the 'me' of myself
and was subsumed within the 'we' of
marriage, relinquishing even her surname
-300p, Penelope
once I started presenting fully as female,
I realized I'd taken a lot of things for granted
as a man -322p, Megan/Morgan
작품의 여성/퀴어 서사는 매운맛이다. 눈물과 화가 날 것이다. 그럼에도 절망보다는 희망의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