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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l 02. 2023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의 '에센셜'한 현대사

내가 그동안 작가로서 추구한 목표 중 하나는 어렴풋하여 간과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의미의 섬세한 뉘앙스와 색조를 묘사하는 것, 공적인 삶과 고독한 삶을 칭송하는 것, 그리고-존 버거의 문구를 빌리자면-"다른 방식으로 말하기"를 해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래된 방식의 똑같은 말하기에 언제까지나 이렇게 얻어맞는게 더욱더 실망스럽다.

-21p, 모든 질문의 어머니




리베카 솔닛의 언어와 서사는 지금까지의 모든 담론을 통합하고 업그레이드 한다. 그래 이 맛이어야 했어! 영어로 읽어서 아리송했던 <산책의 역사> 또는 <걷기의 인문학>은 분량과 스케일이 거대하여 완주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었는데, 정작 읽었어야 할 책들은 손 놓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았다. 이 책에서만 두 번 이상 나오는 엘레나 페란테에 푹 빠져있는 이 시점에 재회한 솔닛의 모든 말과 모든 행간에 더없이 설득되었다.


솔닛이 좋으면서도 어려운 건, 여성서사와 여성작가들을 포함한 방대한 레퍼러스를 활용해 일상의 역사를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요약하기 때문이다. 굳이 솔닛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영어권 작가들의 레퍼런스에 기죽지 않으려고 약간 매운맛 에세이(알고보니 솔닛과 마찬가지로 '윈덤캠벨문학상' 위너인 올리비아 랭과 비비언 고닉과 캐시 박 홍, 그리고 유럽병 걸린 산책덕후 미국언니 로런 엘킨)들을 일년 내내 읽었고, 바쁘니까 순한맛은 손도 안 댔다.


빈출 고전 도장깨기로 솔닛에게 대차게 까이는 헤밍웨이까지 훑었으니 탑 클래스(?)는 읽었다 치고 확장하는 중이다. <모비딕>은 어쨌든 걸작인 것 같지만 트렌드는 이미 놓쳤으니(!) 한동안 보류하고, 다시 <프랑켄슈타인>부터 영어판을 차곡차곡 모으면서, 모리조의 딸이자 마네의 조카인, 줄리가 표지에 등장하는 <더버빌가의 테스> 재독 타이밍을 노리고 있다. (말 나온 김에 장바구니를 또 편집해야겠다.)




책덕후와 산책덕후인 샴쌍둥이같은 자아를 발견한 나의 언니들 중에서도 솔닛의 언어는 가히 독보적이다. 페란테가 독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점에는 그녀의 산더미같은 서사에 완전히 홀려 있었고, 역사가 솔닛은 종종 더 예리한 지성과 집중력을 요했다. 팩트에 기반한 서사를 이토록 맛깔나는 언어로, 그것도 기존의 오염된 언어를 차례차례 부수면서 재건하는 작가가 있었던가?


물론 있었다. 드디어 한글판으로 읽어볼 수 있게 된 벨 훅스의 <난 여자가 아닙니까?>도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도착했다. 솔닛으로 뒷북치고 있는 부끄러움을 상쇄시켜줄 벨 훅스 얼리어답터라는 자부심이 올 여름을 빛낼 예정이다. (한편 출간이 조금 연기된 <다락방의 미친 여자> 후속작, <스틸 매드>도 펀딩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벨 훅스는 백인 엘리트 여성 페미니즘을 정면 돌파한 흑인 여성 작가, 리베카 솔닛은 백인이라는 정체성을 간과하지 않고(상대적으로 다른 백인 여성 작가들은 본인의 퀴어성, 타자성을 언급하면서도 백인임은 스킵하는 듯한 어색한 침묵이 느껴진다.) 예리하게 의식하는 중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백인 여성 작가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을 자신이 갖지 못하는 건 일종의 침묵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한 방편이고, 무가치한 말은 심지어 침묵보다 더 나쁘다. -51p, 침묵의 짧은 역사


우리 주제가 침묵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남들을 침묵시키는 방식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범위를 더 넓혀서 수모, 굴욕, 배제, 멸시, 비하, 협박, 그리고 사회, 경제, 문화, 법적 수단을 동원한 권력의 불평등 분배까지 아울러야 한다. -60p, 침묵의 짧은 역사


차별은 누군가가 어떤 측면에서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에게는 동일시나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 우리 서로 간의 차이가 전부이고 공통의 인간성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67p, 침묵의 짧은 역사


정치하는 여자는 너무 여성스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남자 같아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성은 지도력과 연관되는 속성이 아니고 남성성은 여자가 누릴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91p, 침묵의 짧은 역사


조화는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여 사들이는 것일 때가 많다. -120p, 봉기의 해


요컨대 그들은 세상이 변한 게 불만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것이다.

-144p, 봉기의 해


모든 폭력에는 권리의식 혹은 권위주의가 있다. 우리는 살인자가 타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말한다. 앗는다  가로챈다는 뜻이다. 훔치는 , 자신이 소유자인  특권을 행세하는 , 타인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기 것이라서 그래도 된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것이 아니다. -178p, 일곱명의 죽음, 그후 일년




물론 일하지 않는 여자는 늘 있었다. 그들은 보통 일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들의 여가는 사냥꾼 배우자가 아니라 하인들이 제공했으며, 그 하인들 중 많은 수는 여성이었다.

-205p, 500만년 된 교외에서 탈출하기


여자는 누구든 걸어다니는 여성 대표처럼 취급되기 쉬운 데 비해 남자들은 비교적 그런 판단에서 자유롭다. 백인을 일반화하는 말은 많이 들리지 않고, 루프나 찰스 맨슨은 제 인종이나 젠더의 수치로 여겨지지 않는다.

-215p, 비둘기들이 다 날아가버린 비둘기집


어떤 백인들은 아무 흑인이나 붙잡고 무질서한 봉기를 설명해보라고, 혹은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자신이 마주치는 흑인은 누구든 모든 흑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저럼. 범주를 아무런 검증 없이 믿지 않고서는 인종주의자가 될 수 없다.

-218p, 비둘기들이 다 날아가버린 비둘기집


그리고 헤밍웨이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성기 크기에 대해서 했던 쓰레기 같은 소리는 딱할  아니라 그의 내면을 너무 투명하게 보여준다.

-234p, 여자가 읽지 말아야   80


독서란 자신의 젠더를 (그리고 인종, 계급, 성적 지향, 국적, 시대, 나이, 능력을) 탐구할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초월하여 타인이  상태를 추체험하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겨우  말에 어떤 남자들은 화를 냈다. -243p, 남자들은 자꾸 내게 <롤리타> 가르치려 든다


상대가 당신과 자기 샌드위치를 나눠 먹기를 원하지 않는 한 당신은 그의 샌드위치를 먹을 수 없다. 이건 당연한 소리고, 억압이 아니다. 이런 건 다들 유치원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251p, 남자들은 자꾸 내게 <롤리타>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가치 있는 것을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무가치한 용기인 모양이다.

-263p, 사라진 범인


남자들은 일종의 날씨처럼, 주변에 감도는 자연력처럼, 우리가 다스리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불가피한 무언가처럼 추상화된다. -267p, 사라진 범인


관계를 맺는 것, 결혼,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는 많고많으며, 사랑에서 빠져 나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도 얼마간 있지만, 사랑을 오랜 세월 지속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들은 다투고, 화해하고, 참고, 적응하고 자식을 낳는다. -283p, 거대한 여자




솔닛의 아주 지적인 미러링도 강추하는 코스다. 한편 <위기의 주부들>로 대표되는 교외 중산층 전업주부 이미지로부터 조작된 선사시대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역사가의 뷰포인트도 반드시 챙겨야 할 코스다. 관련해서, 빅토리아 시대 남성 과학자들이 망쳐놓은 생명과학을 전면 재검토한 루시 쿡의 신간 <암컷들>도 곧 리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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