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과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본질인 이데아의 현상인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즉, 예술은 확정된 진리의 모방의 모방일 뿐이었다. 세잔이 거부한 것은 바로 이 확정된 진리의 모방으로 전락한 예술이었다. 세잔은 그동안 통용되던 사과와 관련된 신화, 실용적 목적 모두 걷어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과 그 자체를 무연히 바-라-보-았-다. 로런스는 이것을 세잔이 '사과의 사과다움'(appleness of an apple)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182p,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이진숙, 2021)
그림의 유명세, 화가의 이름값을 알고 그림을 보는 것이 위험한 시기가 있다. '유명하니까' 그림을 보러가서 '유명한' 그림을 본 나 자신을 칭찬하며, 나 '유명한 그림 본' 사람이야, 라는 자만심이 그림 자체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모두가 그런 시기를 겪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예술이라는 것은 그런 보통 사람의 허영심을 먹고 자란다. 나는 무한히 성장하는 딜레탕트로서, 그러한 허영심을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허영심, 과거와 현재의 허영심을 인정하고 그 허영심을 활용해서 공부하자고, 더 알고 더 자랑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가벼운 예술여행>의 평행세계에 <인스타그램 셀럽의 조건>이 있다. 예술여행도 인스타그램도 어떤 사람에게는 사치일 수 있으나 그것이 내 영혼의 양식인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으니 먹고 살기 바빠도, 이왕이면 고차원적으로 보고 즐길 것이 있어야 한다.
폴 세잔(1839-1906)의 그림은 인스타가 터지도록 감상하고 왔다. 폴 세잔 실물영접 인증샷을 자랑하기 위해 열 장을 꽉 채운 포스팅을 했고 그 후로 미국 화가들에게 각자의 폴더를 만들어줬다. 내가 보유한 직촬사진 중에서 세잔보다 작품 수가 많은 작가는 모네, 고흐, 피카소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 화가들의 계보나 인물관계도, 특히 작가들과의 연관성을 탐구하다보니 자꾸 세잔이 등장했다. 에드워드 호퍼는 존 싱어 사전트의 방계에 속하지만 서울에서 본 그의 시골 풍경에서 세잔의 초록이 떠올랐고, 러시아 여성 화가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세잔과 클림트와 알폰소 무하를 아우르는 화풍을 보여준다.
그 대단하다는 피카소의 유일한 스승이 세잔이라는 것도 어느 시점에 알게 됐는데, 2년 전 피카소 전시를 보러 갔을 때만 해도 세잔은 커녕 피카소도 이름밖에 모를 때였다. '나 유명한 그림 본 사람'의 과도기였다. 서울에서 10년 전에 봤던 고갱은 뉴욕에서도 알아봤지만 고갱 한 점은 세잔 폴더에 무단침입했다. 무아지경에 사과 그림을 세잔에게 몰아줬다가 아무리 봐도 저 꽃은 세잔이 아니어서 구글렌즈에 돌려봤더니 고갱이라고 한다.
구글렌즈가 없었다면 정말 모든 것이 힘들었을 것이고, 나는 딜레탕트 지망생이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래도 인스타그램과 인터넷에 방대한 사진자료를 업로드하는 사람들을 허영심 가득한 우중이라고 할텐가? 호기심 많은 여행블로거들의 사진 파일 덕분에 미술 공부의 벽이 낮아졌고, 그들처럼 인증샷을 찍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욕망은 필연적인 결과이니 감수해야만 한다. 아무리 지겨워도 말이다.
여행의 이유는 미술만이 아니었지만, 지나가는 길목에 탑클래스 미술관이 있는 것을 어쩌나.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여행을 시작한 이유 중 인스타를 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하루종일 인증샷을 찍어도 온라인에 공개할 수 없는 현생으로 가득찼던 시기에 인스타 계정을 처음 만들었다. 보통의 회사원처럼 음식 사진만을 올리기 싫어서 2년 동안 인스타를 방치했을 때, 나의 유일한 낙은 앞으로 인스타를 도배하게 될, 뉴욕으로 향하는 항공권을 검색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두 번 방문하고 시카고 미술관, 노튼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워싱턴DC 내셔널 갤러리까지 다녀온 '나 유명한 그림 엄청 많이 본 사람'은, 4년째 자랑 중이다.
그런데 이 자랑이 점점 거대해지고 있다. 사전트, 호퍼까지는 사진이 많아서 괜찮았는데 다른 미국 화가들은 잘 몰라서 잘 못챙겼다. 작품수가 엄청나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방문한 두 번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촬영에 주력하느라 제대로 감상도 못했는데(!) 오픈런으로 입장해 마감 직전 퇴장했고, 그럼에도 누락된 그림이 너무 많다. 폴 세잔 만큼 폴더가 터지게 많았던 르누아르도, 그리고 폴 세잔도 누락된 그림이 있다. 어떤 화가는 한두 점 뿐인 작품이 너무 좋아서 온라인으로 다른 그림을 전부 감상한 적도 있다. 아치볼드 모틀리 주니어와 로버트 프레데릭 블럼을 조사할 무렵에는 서울의 실시간 전시 투어도 시작하게 되는데....
그리하여 다시 고갱전이 열렸던 서울시립미술관의 호퍼를 거쳐, 아직 예매 상태인 라울 뒤피를 위해 예습하다가 또 세잔을 만났다. 그렇게 본론으로 돌아오자. 지난 세잔 이야기는 워싱턴DC에서 만난 <할리퀸>과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에 시선강탈을 당한 상태로 작성했다. 당연히 사과 그림도 많은데, 이 많은 사과를 계속 기록한 나 자신을 칭찬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세잔을 어설프게 알아서 그의 사과 그림이 이것보다 더 많다는 것도 어설프게 알았다면 오히려 전부다 촬영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위키아트를 알게됐으니 세잔의 거의 모든 작품을 스크롤해봤다. 볼만큼 봤다고 하자니 끝없이 나오는 사과 그림과 그에 못지 않게 끝없이 나오는 가로수길 사이로 종종 자화상 무더기가 있고 가끔 마담 세잔이 등장한다. 초기에는 에밀 졸라도 그리고 그 시기의 다른 화가들처럼 종교화를 그렸는데 머지않아 마네가 <올랭피아>를 들고 나왔고 종교화에서 판타지를 걷어내고 있던 세잔은 올랭피아마저 자기 스타일로 그려낸다.
정물화를 거의 처음 그렸던 1865년까지만 해도 고전적인 스타일이었지만 1년 후에는 아마도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순서로 매끈한 명암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1863년에 등장했고, 이후 자신이 그리던 풍경화, 종교화 등을 계속 해체하던 세잔은 1870년에 <모던 올랭피아>를 완성했다. 이 시기의 세잔에게는 발튀스의 원형도 보인다. 세잔의 시그니처로 많이 거론되지는 않지만 해골 그림도 많다. 초상화가들은 해부학도 공부하니까 특이점은 아니지만, 세잔은 정물화로써 다른 소품과 함께 해골을 많이 그렸다.
<모던 올랭피아>를 시작으로 세잔은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또 그린다. 에밀 졸라도 그리고 냅킨을 곁들인 사과도 그린다. 올랭피아도 다시 그리는데 미완성작이다. 여성들이 등장하는 시골 풍경과 성모화를 동일선상에서 그리려고 하는 듯한 연작이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관능적이기보다 기능적으로 벗고 있는 목욕피플과 사과를 계속 그린다.
세잔의 70년대 사과가 만개한 그림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있다. 대문과 본문 2번째에 나오는 작은 그림이다. 평화로운 풍경화가 가득한 80년대 초에는 자화상, 풍경화, 사과, 마담 세잔만이 반복된다. 그러다 1888년에 빨간 조끼, 할리퀸이 갑자기 등장한다. 자화상과 마담 세잔의 초상화로 자기 스타일을 정립한 그의 시그니처가 본격적으로 만개한다.
빛과 시점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색채의 고정되지 않는 셰이드를 담아내려는 그의 시도는 사과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되었고, 그래서인지 빨간 의상을 착용한 인물을 더욱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할리퀸 연작 이후로 마담 세잔도 붉은 계열의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다. 더 멀리서 바라본 사과의 단체샷이 등장하는 90년대에는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연작을 그렸다.
사과와 물병에 다른 소품이 추가되고 마담 세잔 이외의 평민 여성들도 그렸다. 오랜만에 등장한 <푸른 옷을 입은 마담 세잔>은 오르탕스 피케와 전혀 다른 모습인데 며느리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20세기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만개했기에 더욱 유한한 꽃다발이 든 화병을 그렸다. 여전히 풍경화, 목욕하는 사람도 그렸다. 어린이나 젊은 여성을 굳이 그리지 않았던 그가 말년에는 인형을 안은 소녀를 두 점이나 그렸다. 그의 마지막 사과(본문 첫번째 그림)를 워싱턴DC 내셔널 갤러리에서 봤다.
자연스러운 산책피플을 그린 그림도 있지만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단체초상화나 폴 세잔 본인의 다른 그림들에 비하면 주력 장르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어부(상상화)>는 1870년대 중반의 작품이다. 움직이지 않는 모델의 미묘한 변화, 시시각각 변하는 색조를 평생 탐구해 온 세잔이 반복적으로 그렸던 목욕피플과 같은 맥락이겠지? 목욕피플은 모아놓고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듯이 실제 모델이 아니다. 게다가 평상시 그의 모델이 사과, 나무, 자기 자신, 자기 아내였던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당연히 목욕피플은 가상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목욕피플의 그림들에서 반복되는 포즈와 동작, 내향인과 외향인의 공존, 나무와 빛의 방향을 연구하려던 그만의 목적이 있었다. 단체초상화의 이데아인 다 빈치 스타일의 종교화를 해체하는 작업이기도 했겠지만, 이 그림을 죽을때까지 그린 이유은 여러 인간의 형태와 질감, 피부색을 한 그림 안에서 연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비슷한 구도의 목욕피플 그림을 함께 보고 있자니 세잔의 혼잣말이 들리는 것 같다. '아, 이 포즈는 좀 어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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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그림을 보다가, 세잔 이후의 다른 화가들의 닮았지만 서로 다른 개성들이 궁금해져, 봤던 그림을 포함한 전작품 털기가 시작됐고 다시 돌아와 세잔의 전작품을 털어봤다. 더 알아보고 싶은 질문도 많아졌지만 여행 4주년을 앞두고 아직 손도 못댄 화가들이 많기에 지금은 여기까지.
세잔 이후의 화가는 거의 다 세잔의 후예라더니, 그 후로 알게 된 현대 화가는 물론 이미 나도 모르게 알고 있던 앤디 워홀이나 월트 디즈니에게서마저 세잔의 기운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세잔 덕질을 끝낼 수 없다. 그가 죽을때까지 목욕피플을 그렸듯이 나는 죽을때까지 세잔피플을 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