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텍처 크루즈라는 클라이막스
시카고 리버 아키텍처 크루즈는 출국 전에 예약해 둘 정도로 뉴욕 스냅 촬영 또는 도시별로 방문하게 될 1순위 미술관들과 동등한 액티비티였다. 여정이 조금 복잡해서 무한대(infinite)기호 또는 8자 모양의 동선이 되었고 도시간 이동 수단을 정밀하게 예약했지만 대체로 시내 일정은 두루뭉술했다. 그래서 보다 즉흥적인 세렌디피티가 이루어졌고, 적어도 시카고 여행은 더 풍성해졌다.
바다같은 미시건 호수로 통하는 시카고 리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도보로 다리를 왕복할 수 있는, 크지 않은 강이지만 보트가 다니기엔 충분했다. 리버 크루즈는 대략 30명 정도 탑승하면 적당히 북적거리는 보트였다. 강변의 건축물과 시티뷰를 배 위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내가 예약한 배는 네이비피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틀 연속으로 네이비피어의 여러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시카고 4일차의 오후에는 크루즈를 타야 했기 때문에 낮에 스웨덴 마을인 앤더슨빌을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기에 여유 없는 산책을 하고 난 뒤, 네이비피어에 도착했다. 전날도 낮에는 쨍하던 하늘이 점점 하얘졌다가 결국 비를 쏟아냈는데 이날은 안개가 시카고 중심부를 삼켜버린 모습이었다. 앤더슨빌 주변도 계속 쨍하진 않았지만 오고 가는 전철에서나마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네이비피어에서 출발해 미시건 호수로 긴 호를 그리며 나아갔던 배에서 고층 건물로 빽뺵한 시카고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각, 강 하류는 건물들의 저층부만 살짝 보이는 상태. 우중충했지만 건물의 윤곽 전체가 보였던 전날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눈에 익은 스카이라인이 안개 속에 묻혀있는 장면을 지나 배를 돌리는 합류지점까지 왔을때는 안개가 걷혀있었다. 정확히는 하류만 안개에 잠겨있었던 것이다. 오후 5시 반, 배가 출발할 때는 어두웠는데 안개존을 벗어나니까 6시가 넘었는데도 햇빛이 고층 건물의 창문 또는 외벽을 빛내고 있었다.
하류로 돌아오는 동안 일몰과 함께 점등이 시작되었다. 사진찍기 좋은 오후 4시를 목표로 달려왔지만 늦어서 5시에 탑승했고 덕분에 선셋 크루즈에 가까워졌다. 시카고에 가기 1년 전에 다녀온 짐바브웨에서 선셋크루즈를 맛을 알게 되었는데 그땐 정말로 해가 잠베지 강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하지만 시카고 강을 빠져나와 네이비피어로 복귀할 때까지 어둠이 깔리진 않았다. 옅어진 안개 사이로 아까보다는 건물이 잘 보였고 호수의 반대쪽으로 사라져버린 해는 보이지 않았다.
크루즈 위에서 보는 시티뷰의 주의사항이라면 '건물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크루즈에 탑승하면 라이브로 도시 전경을 약 한 시간에 걸쳐 훑어볼 수 있다. 라이브 공연과 앉아서 관람하는 건축 박물관의 콜라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크루즈 위에서 카메라에 도시를 담으려면 근처에 있는 건물보다 멀리 있는 풍경에 집중해야 한다.
선상에서 라이브 포토로 100장이 훌쩍 넘는 사진을 촬영했다. 대부분 지나친 클로즈업으로 건물이 잘려서 나왔고 흔들려서 수평도 안 맞았고 올려다보는 구도가 많았다. 그럼에도 남은 기록들을 쉽게 지워내지 못해서 매력적인 사진을 골라내기 힘들었다. 랜드마크나 강물이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면 시그니처가 없어지기에 그런 사진들은 결국 걸러내고 말았다. 누가 봐도 시카고인 '이 구역의 베네치아' 느낌을 찾아 고르고 고른 사진들은 손에 꼽는다.
전망대에서 보는 전지적 새의 관점* 또는 항공뷰와는 다르게 건물 하나하나에 압도당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경험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육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느리게 꾸준히(steadily) 이동하는 수로에서 효율적으로 도시의 시공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다른 것과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bird-eye view: 조감도, 높은 고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 전경
일몰은 9월 시카고의 마지막 밤으로 이어졌고 하선 후 리버노스로 돌아와 마이애미를 준비했다. 새벽 비행기로 마이애미에 갈 예정이었다. 잠깐 자는 척만 하다가 새벽 3시 반에 공항철도를 타야했기에 조식은 더이상 먹을 수 없었다.
계속 기억을 잡아당겼더니 갑자기 이 숙소의 지하식당에서 그날 아침으로는 요거트와 토스트 등을 먹고 저녁으로는 편의점에서 사온 음료수와 간편식을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기억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무엇을 먹었는지 몰라서 굶었다고 생각했다. 장부에는 당당하게 '편의점 제외'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편의점에서 범죄도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은 잊혀진 적이 없다. 월요일 밤, 거리는 파티와 축제가 한창이었는데 안개 낀 디스토피아의 무서운 편의점으로 스릴은 이미 충분했기에 비행을 위해 몸을 사리기로 했다. See you in Miami. (시카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