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바차타, 전화위복
타임라인의 주요 목적은 여행 기간 동안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 시간을 한눈에 보는 것이었다. 비행기, 버스 등의 출발 시간과 체크아웃 마감 시간을 표시하고 그 사이사이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블록처럼 배치했다. 하루 한 페이지씩 계획하고 기록했던 이 노트에는 그날의 여행에 대한 한줄평이 달려있다.
마이애미에 도착한 날은 '고생, 바차타, 전화위복'으로 요약되어 있었다. 전 날의 한줄평은 '크루즈가 열일함'이었다. 시카고에서 마지막 밤 산책을 하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전철을 타고,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무모하게 엄청 많이 걸어서 오후 3시에 마이애미 리틀 하바나에 있는 부티크 호텔 킹 룸에 체크인을 했다. 이 12시간을 요약하면 '고생'이다.
체크인 후 일단 지친 갈증을 위해 미니바를 털고, 다음 날까지 마셔야 하는 물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드럭스토어를 또 털고, 그 사이의 어느 시점에 쾌적한 나만의 욕실에서 씻고 fresh up 하고 클럽에 갈 준비를 했다. 마이애미의 쿠바 마을, 쿠반 타운인 리틀 하바나에 왔으니, 낮에는 '고생'하느라 제대로 구경을 못했지만 밤에는 살사 클럽에 가야 한다. 내일이면 다른 동네, 다운타운으로 뜰 것이기 때문에 기회는 한 번뿐이다.
하지만 이 날의 키워드는 '바차타'였지. 왜냐하면 당시 남한과 의외로 결을 같이하는 플로리다에서는 센슈얼 바차타가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 전체가 센슈얼 바차타에 적극적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가능성을 다 비교하고 음악 비율까지 알아볼 정도로 치밀하고 싶지 않았다. 이 여행에서 음악과 춤이라는 테마가 적지 않은 비중이지만 다른 음악의 도시에서 그러했듯이, 클럽은 현장에서 위치기반 검색을 하거나 걷다가 끌리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경우에 따라 미리 알아보고 목적지를 정한 사람을 따라가도 괜찮다.
라틴인구가 많은 플로리다에서도 특히 이곳은 리틀 하바나이고, 이 근처 클럽은 실패할 수 없다. 기대했던 시카고 음악투어는 라틴재즈 라이브를 감상하는 저녁식사 한 번으로 끝났다. 플로어가 없는 재즈 클럽에만 다녀왔고 그래서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별도의 댄스 클럽까지 다녀올 정신적인 여유는 없었다. 이제 마이애미의 첫 번째 거점이 리틀 하바나인 진짜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메인 스트리트의 댄스 클럽에 달려갈 차례이다.
리틀 하바나의 명소이기도 해서, 댄서가 아닌 보통의 여행자들도 찾는다는 <볼 앤 체인>은 다른 말로 하면 '족쇄'이다. '족쇄'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는데 그 아이콘을 자세히 보면 볼과 체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족쇄를 찬 상태로 춤을 추다 보니 절뚝거리게 됐다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빠른 무곡 메렝게와 구슬프기 그지없는 바차타를 상징하는 것일까. 처음부터 도미니칸 스타일을 작정하고 만든 클럽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쇼 비즈니스 스타일 살사 댄서가 아닌, 라틴 아메리카의 진짜 라틴댄서들을 위한 클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인들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에게 카리브해의 춤을 배워서 왈츠 등의 장르처럼 루틴을 정비하고 사교댄스화 했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무곡 중의 일부는 이미 스포츠댄스의 라틴 5 종목이 되었지만, 더 흔하고 대중적인 장르는 스윙 댄스처럼 클럽과 클럽 무대용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살사의 고향 쿠바에서는 살사와 차차 등이 스트리트 댄스 또는 막춤에 가까운 클럽 댄스이므로 '루틴을 배워서' 추지 않는다. 자세한 내막은 더 조사해야 하지만 간단하게 보려면 영화 <더티 댄싱>을 참고하자.
이 날은 멋진 선생님들이 센슈얼 바차타 무료 워크샵을 하는 날이었다. 미국에서 이렇게 체계적인 바차타 인구를 양성하는 곳이 있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 경험해본 뉴욕과 워싱턴 D.C의 살사 클럽에서는 바차타를 출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뉴욕에서는 이후에도 매번 말도 춤도 안 통하는 아시아 남자들과 영어로 싸워야 했다.
내 소중한 바차타를 망친 것도 모자라 아시아 남성 특유의 '기사도 1도 없는 가부장적인 태도'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남성들이 특히 인종적으로 강등된 기분을 느끼기 쉬운데, 이들 중에서도 영어나 바디랭귀지가 미숙한 사람들은 아시아 여성에게 먼저 접근한다. 아시아 여성은 영어가 조금이라도 된다면 '누구라도' 될 수 있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데, 여태껏 나를 찍어 누른 아시아 남성의 타깃이 되어 잠시나마 발목이 잡히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보수적인 국가 출신의 아프리카 남성이 아시아 여성은 순종적일 거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녀 불문하고 아시아 직원을 선호하는 유럽인 보스도 있다고 한다.)
뉴욕에서는 출 기회가 더욱 희박한 장르인데 이성 간의 스킨십이 자연스럽지 못한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바차타에 대한 인식조차 여성 혐오적이라 못 추는 주제에 거만한 아시아 남성들은 용서가 안 된다. 미국의 클럽에서 한국 남성을 본 적은 없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 정도로 못 추면 미안해할 줄은 안다. 최소한 본인이 여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행위는 거의 하지 않는다. 한국 남성들의 매너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춤 실력에 대한 기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서 비교적 겸손할 뿐이다.
마이애미의 문화적 인프라에 사로잡혔다. 남미와 유럽이 주도하는 바차타 스타일이 풍성했고 윈우드 월스라는 벽화마을의 수준 높은 스트리트 아트, 사우스 비치의 끝없는 모래사장을 본 뒤로는 아예 이곳에 이사 오기 위해 살겠다는 목표가 고정되었다. 그전에 이미 리틀 하바나에서 워크샵을 했던 재스민 공주에게 반하기도 했다. 아마도 춤은 거의 남자들이랑 추겠지. 참 안 퀴어(queer) 한 이 세계. 그럼에도 정작 남자들끼리도 추고 구경하는 재미도 크다. 중의적인 의미로 '호모 소셜*'이 되겠지만. 사실 여자들끼리도 춘다. 난 도쿄에서 드랙퀸이랑도 췄다. 괜찮은 바차테라가 없다면 잡아줄 남자들이 발전하지 않을 테니, 공주님의 역할이 크다.
모히또를 마시면서 워크샵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바차테라가 부족해서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물 나게 그리운 시절이다. 워크샵에서 '얼굴'을 익힌 파트너들과 프리댄스를 추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진짜 쿠바 남자, 동부 워싱턴 특별시가 아닌 서부 워싱턴 주에서 놀러 온 남자, 마이애미 토박이 등. 이렇게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춤을 춘 적은 한국에서도 드물었다. 원래 나는 플로어에서 '말'로 대화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춤으로 소통하고 눈으로 말하는 것이 원칙이니까. 말이 많아지면 흐름이 끊기고 무드가 사라진다. 지금은 말을 해도 시각적, 청각적으로 마스크에 가려진 상태이니 상대방이 못 듣는다. 반면에 마스크를 쓰니까 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표정이 안 읽히기 때문에 부차적인 소통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homo social: 특정 성별이 커뮤니티를 장악함으로써 동성 간의 연대감을 공유하고, 비주류인 성별은 소외되는 사회 현상
돌아오는 길에 원하던 포토존을 발견했지만 밤 12시였다. 씻고 눕고 싶은 생각뿐이라 간판과 벽화만 대충 촬영하고 서둘러 귀가했다.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에 아쉬움이 없었다. 낮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리틀 하바나에 1박 2일을 배치한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이 날은 '전화위복'이 되었고, 다음날은 미련 없이 아침만 먹고 우버를 탔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