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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리틀 스웨덴 접수한 쇼핑의 신

앤더슨빌, 아키텍처 크루즈, 빅토리아 시크릿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시간이 아주 많을거라고 믿었다. 추석날 저녁에 도착했고 4박 5일 중 4일차였다. 아직 팬데믹도 없었고 middle-aged(중년)도 아니었다. 당연히 시간이 많았다.


시카고에서 시작한 5주의 여정(itinerary)은 다음날인 5일차부터 마이애미와 뉴욕에서 각 1주일 조금 넘게 지내고 뉴욕에서 휴스턴까지 이틀에 한 번 꼴로 밤차를 타며 육로 이동(road trip)을 한 후에 악명 높은 스피릿 항공의 국내선을 타고 시카고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시카고 북부의 앤더슨빌 가는 길


실제로 4박 5일 중에서 5일차는 시카고에서 시작될 뿐 시카고에 할당되지 않았다. 첫날도 대부분 하늘 위에서 보냈다고 봐야겠지. 휴스턴에서 새벽 비행기로 돌아온 10월에는 5박 6일을 꽉 채워서 시카고에 머물고 밤 늦게 국제선을 탑승할 예정이었다.


휴스턴에 이어 시카고에서 '또' 얼리체크인을 해주었고 새벽부터 이동하느라 피곤했으니 부실하지만 어렵게 구한 착하고 소박한 숙소에서 20시간 내내 잠들어 있었다. 사실 이 숙소의 8인실이 바로 병원의 병실 분위기였고 여성 전용임에도 전용 욕실이 없었는데, 어쩐지 사무적이기만 한 뉴욕 호스텔보다는 착하고 따스한 곳으로 느껴졌다.


시카고의 여유로운 마지막 6일 중에서 하루가 벌써 사라진 것이다. 다음날은 3박 4일을 지낼 숙소로 이동해서 체크인 시간이 될 때까지 카페 투어를 하고 짐을 풀자마자 겨울옷을 사러 가야 했다. 북카페가 많았던 그 지역이 요즘 뜨는 곳이라던데 그날은 짐도 맡기지 못했고 너무 추웠다. 이미 10월 초에 영하를 넘나드는 기온인데다 마치 11월 초 서머타임이 끝나기 직전의 보스턴처럼 해가 빨리 졌다.



앤더스빌의 스웨덴 뮤지엄


시간이 아주아주 많을거라고 생각했던 9월에는 대부분의 경로에서 숙소와 교통편만 정해둔 상태였는데 숙소 전쟁으로 숙소마저 불투명한 상태. 예측할 수 없었던 10월의 날씨와 컨디션은 링컨파크, 필즈 박물관, 시카고 대학교 등의 밀려난 계획을 대부분 날려버렸다. 구글맵으로 알게 된 '앤더슨빌'은 그렇게까지 유명하지도 않은 곳이지만 9월에 가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잊어버리고 평생 가볼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스웨디시 타운인 Andersonville은 서벌브(교외) 지역 사이에 있는 카페거리 같은 곳이다. 전철에서 이 곳으로 가는 최단 경로를 걷다보니, 아메리칸 스탠다드가 갑자기 유럽풍 동화마을로 바뀐다. 메인스트리트에 스웨덴 박물관과 갤러리 샵 등이 있었고 스웨덴 관련 샵 외에도 이국적인 식품점이자 물담배 가게인 곳도 있었다. 괜찮은 카페라고 생각하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는데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할라피뇨 피자를 실수로 주문했다.



앤더슨빌에서 만난 식품(+물담배) 가게와 서점


이 거리의 핫플인 듯한 Women & Children First라는 여성주의 서점도 있었다. 두 권에 1 달러인 책들이 입구에 나와 있었지만 아직 영어독서를 준비하는 유학 준비의 준비 단계였고 여행 4일차여서 무거운 짐은 늘리고 싶지 않았다. 서점 대신 갤러리 샵에 갔다. 마이애미에서 입으려고 반바지를 샀는데 도저히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핏이 나오질 않아서 예비용 잠옷이 됐다.


몇몇 짐되는 옷들은 이동할때마다 계속 버렸으나 처음 샀던 이 옷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장인의 수공예품까지는 아니더라도 대기업에서 대량생산한 옷처럼 막 대하고 싶지 않았다. 또 무엇을 샀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장부를 확인해보니 앤더슨빌에서 구입한 것은 그게 다였다.



안개속에 잠긴 시카고 강변의 스카이스크래퍼들


시카고 쇼핑이 그게 다는 아니었다. 시카고 미술관과 세포라에서 기념품 겸 약소한 선물을 미리 사두었다. 앤더슨빌에 다녀와서는 아키텍처 크루즈를 타야 하는데, 마지막 탑승 시간을 놓치면 예약금을 날려야 했기에 충분한 쇼핑의 시간은 없었다. 대신 크루즈 위에서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이 안개를 뚫고 나왔다가 다시 잠기는 것을 감상한 뒤, 9월 시카고의 마지막 밤은 리버노스의 쇼핑 천국인 메인 스트리트를 혼자 여유롭게 걷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세렌디피티였다.


한 달 뒤에 돌아온 시카고는 너무도 추워서, 그럼에도 실컷 혼자 걸었지만 항상 덜덜 떨었고 여유롭지 않았다. 그 9월의 마지막 저녁,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에서 '핑크'의 스포츠웨어 상의를 구입했다. 착용하면 비키니로도 보이는 그 브라탑은 3년 후 서울에서 레게톤 공연의상으로 활약했다. 빅토리아 시크릿 옆에 있던 러쉬에서 구입한 배스밤은 마이애미 호캉스의 절정을 장식했다. 귀국하기 전날에는 같은 매장에 다시 가서 마지막 밤의 거품목욕을 위한 배스밤을 더 구입했다. 욕조와 파스타와 넷플릭스라는 3종세트로 긴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혼자 준비하는 과정이 그리 우아하지는 않지만, 미드 덕후의 로망이었다.



귀국 전 이틀 연속으로 방문했던 카페에서


미국 여행과 그 전년도의 아프리카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신나게 쇼핑했었다. 그 전에는 쇼핑욕구가 예산을 초과했기에 항상 갈증을 느꼈고 한동안은 옷이 아닌 원단을 사러 다녔다. 가장 최근의, 가장 길었던 해외여행인 <무한대 미국일주> 이후로는 팬데믹과 함께 쇼핑욕구도 사라졌다. 이쯤되면 여행과 쇼핑을 패키징할 수 있게 된다. 여행용 착장을 사러다닐 의욕이 부족했지만, 여행 자체가 사진이나 착장 욕구를 자극하기에 여행을 간 김에 쇼핑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도시여행의 맛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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