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구슬>
사람에게 반하고 나서도 사소하게 실망하는 순간이 있다. 이 사람과 결국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더 이상 설레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교제 비슷한 것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잘못된 시공간의 만남도 있다. 잘못된 만남 그 자체가 치명적인 것일까? 잘못된 사랑에 끌리는 것도 병일까? 불가능하기에 더 좋아보이는 착시현상일까?
그나마 덜 잘못된, 그나마 실현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을 예로 들면 나는 그 친구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어서 그의 주위를 맴돌다가 그가 모르는 온갖 엽기적인 사건사고를 치르느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의 친구들을 골라서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 나의 인공위성 중에는 어렸을 때 우러러봤던 사람도 있었고 다시 시간을 돌려보면 반대 입장, 그러니까 내가 인공위성이었을 때도 그가 아예 모르지는 않았을 온갖 엽기적인 사건사고를 치르느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내 사랑은 시작부터 불가능함과의 싸움이었다.
무상은 내게 impossible이라는 단어를 love와 함께 알려주었다. 불가능한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의 애정이 제자는 물론 동생 친구를 넘어섰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어떤 불길한 취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오로지 나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호기심은 상대방이 여자일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헤테로 남성들을 납득시킬 의무는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0년만 늦게 만났다면 (그럴 경우 다른 방해 요소가 있을 확률이 더 크지만) 전혀 문제가 없는 겨우 열 살 차이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여자가 아니었다. 이차성징이 발현되려면 3년 정도 더 있어야 하고, 그래봐야 청소년.
그러니까 미성년자가 될 뿐.
정신적으로는 내가 곧 여자일 거라는 예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열 살에 독신주의자 선언을 했을 리가 없다. 그 시점에 <아들의 여자>를 시청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독신주의자 선언이 앞선다. 대체 뭘 보고 결혼에 회의를 느꼈을까? 아빠는 자기 때문일 거라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한 말을 자주 잊는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아빠보다는 <아들의 여자>가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여자>보다 앞선 해에 벌어진 독신주의자 선언과 첫 가출의 시기가 비슷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였던 것 같다. 가출은 시시하게 끝났다. 가출 당일 전부터 꽤 오랫동안 스파이 가방에 넣을 물건을 따로 보관하는 서랍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출을 결심하고 1분 만에 집을 나서던 그 순간의 짜릿함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동생을 버리고 나왔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미드 <지니 앤 조지아>의 지니는 이복동생을 야무지게 챙겨서 가출하던데, 나는?
동생이 내가 나간 상황을 프로세싱을 하기도 전에 우리 집으로 출동하고 계셨던 할머니와 다정하게 귀가했지만, 원래 미안함이나 서운함은 팩트보다는 심리적인 것 아닌가. 버렸다는, 혹은 버려졌다는.
생애 최초의 독립은 결심부터 취소까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독신주의가 시작됐다고 추정해본다. 정신적으로는 혼자 살 수 있었다. 동거인들은 너무 시끄럽고 귀찮았다.
친구들과 동거 아닌 동거를 거쳐, 진짜 동거를 하게 되기까지 라이프 스타일을 압도하는 격랑을 만났고 후에는 좀더 효율적인 연애를 위해 독거 시스템을 정착시켰지만 이건 오히려 주객전도의 느낌이 든다. 말 그대로 손님을 위해 세대주와 손절했다.
처음으로 강한 독립의 욕구를 느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 무상이었다. 정신연령이 높은 친구이자 인생 선배였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중요한 단어를 공공장소에서 입에 올리던 그 순간 '의지할 수 있는'은 취소했지만.
한편 무상의 자랑 섞인 호들갑은 이 상황의 독특한 배타성을 광고한 셈이다. 연애까지는 아니었지만 비밀연애에 지친 걸까. 어느덧 다른 아이들을 향해 일종의 과시를 하는 측면이 비치고 있었다. 무상은 본인이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 독점욕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스스로 즐기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