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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23. 2023

어느 겨울 아침

단편소설 <몫과 나머지>

처음에는 허세 혹은 그 이면의 열등감, 그 후에는 죄의식과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 필터로 강해진 프로필 이미지나 그의 콩깍지로 확대된 이미지보다는 그냥 자연인인 나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비록 그가 나를 일정 정도 과대평가했고, 타인들의 단편적 정보가 추가되었기에 쓸데없이 신비로운 사람으로 읽혔을지라도.


나는 애써 귀염을 떨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나사 빠진 척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사가 빠진 것을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에게 말그대로 취미를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자고 했을 뿐이고, 날이 밝아오는 건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섭리였다.


그렇게 우리의 첫 데이트는 1박 2일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날짜나 세부 사항은 기억나지 않는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의 포근한 팔베개 뒤로 찬바람이 느껴졌다. 쌩쌩 부는 겨울바람은 아니었다. 외벽을 통해 연기처럼 스며드는 이른 겨울의 얕은 바람이었다. 목 아래로는 그의 체온이 한없이 따스했고 머리카락을 스치는 정도의 겨울 숨소리. 이렇게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한 맺힐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커튼 없는 창이 환하게 밝은 지 오래였지만 도저히 그냥 잠들 수 없었던 아침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숙면을 취했다. 우리는 짧고 그리 강렬하지 않았던 탐닉의 순간을 지나 신속하게 숙면으로 빠져들었다. 그 후 오랜 시간, 일정하지 않고 긴 주기로 곁을 공유했던 그 모든 순간에 불면이란 없었다. 함께한 시간의 대부분을 잠든 채 보냈기 때문에 내가 그를 관찰할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지만, 나 자신은 낯선 곳에서 잠들지 못하고 내 집에서도 타인과 함께 잠드는 것이 쉽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내게, 그는 수면제였다. 수면베개였다. 안고 싶어서, 그의 일이 끝나기를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다가도 잠이 들 정도로 (정작 그는 내가 잠든 상황이 초조해 달려왔지만) 그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나를 풀어지게 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게 얼마나 소중한 재능이란 것을. 왜 모르고 잡지 않았을까.




잠드는 시간을 일정하게 맞추지 못하고 잠이 부족해 갑자기 늦잠을 자버리는 시간들이 계속됐다. 지독한 칩거 불면증과 여행 불면증, 잠들지 못한 상태로 몸을 혹사시키고 상당 기간 골골거리는 날들이 오게 될 줄 몰랐다. 다 떠나서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날 때까지 품어주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


일어나기 싫다는 생각조차 사치일만큼 꿀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허둥지둥 떠나는 (심지어 본인의 집에서조차!)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잠이 깨지 않던 그날들을 이렇게 그리워할 줄 몰랐다. 다 지난 일인 건 둘째 치고, 재현되지 못할 순간들이다.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로는 너무도 부족하고 터무니없이 모욕적인 내 보석 같은 시간들이다.


그가 내게 보여준 아침 햇살들. 그런 아침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그저 나는 다른 아름다움을 찾아서 더욱 조밀한 인생을 살아야 할 뿐이다. 소모품인 바디필로우에게 그때 그 기억을 계속 투영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추억으로 덮어쓰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동등한 서사를 가지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 사람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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