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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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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몫과 나머지>

전시 2일차, 신인이었던 나와 지우는 관람객이 없는 오전에 출근해 갤러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날 정신없이 오프닝을 하느라 지우와 내가 서로의 그림을 제대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지향점이 달랐으나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했다. 나는 지우의 균형잡힌 미모만큼 아름다운 표현력에 감탄했고, 지우는 나의 넘치는 에너지와 아웃사이더 기질을 잘 수용했다.  


"이거 그쪽이 그렸어?"


이번 전시에 출품한 데뷔작을 두고 지우와 속닥이고 있을때, 갑자기 이상한 남자가 나타났다.




영신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좀 거만했었다. 아직 본격적인 작품활동이랄 것도 없었는데 데뷔작이 지나치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전시의 대표 작가가 영신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자식은 뭔데 반말이야?'


나는 영신이 내 그림에 감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한동안 같은 작업실을 사용했던 선배가 내 작품에 극찬을 했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을 통해 들었다. 그 선배는 내가 인정하는 사람이되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게다가 당사자인 나에게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깍쟁이처럼 무표정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아는데, 표현에 엄격한 선배가 지켜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늘 긴장하고 살게 됐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스승이나 선배의 디폴트였다. 더구나 이 시점에서 영신이 영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몰라서 한없이 건방진 나는 그가 건방지다는 인상을 받았다. 엄청난 미남은 아닌데 알 수 없는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수상했다.


기획전에 참여하는 다른 작가들이 출근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신이 영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벼운 회식을 하는 동안 영신은 나와 지우에게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을 했다. 지우는 그가 없는 그의 작업실에 한동안 출근하게 됐고, 나는 다른 선배의 제안을 고심하고 있었다. 영신이 우선 순위가 아니였다. 영신은 맥락이 어색한 존재였다.




연수의 첫인상은 더 가관이었다. 누가 아웃사이더 아니랠까봐 나는 연수의 작업실에 가서도 연수가 연수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선배들과 실없는 장난을 치는 그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연수와 교류하는 작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인맥만 있고 이름값은 없었던 혜리가 혜성같이 나타난 나를 설득했다. 나는 원래 있었는데 유학 다녀와서 수상을 하기 전까지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전부터 나를 인정했던 아웃사이더 선배와 같은 사람이 그래서 소중했다. 내가 공갈빵이 돼버리면 원석을 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을 가려낼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는 너를 아는 사람도 없을걸?"


혜리는 영신이 나를 외롭게 할 것이라고 했다. 나의 판단오류를 혜리에게 덮어씌우고 싶진 않다. 혜리를 과대평가한 나의 미숙함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혜리가 없었다면, 나는 영신에게 좀더 공정한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혜리가 먼저 낙오되고,  다음은  차례였다. 우리는 체력이나 주량에서도 한참 모자랐고 근성은 그야말로 저질이었다. 작업실을 독립시켰다. 연수와는 미대가 아닌 경영대학원을 함께 다니면서 뜻밖의 우정이 시작됐다. 그는 내게 하늘같은 선배였지만 각자의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있는 포용력이 있었고 본인의 일에 대해 숨은 실력과 자부심이 있었기에  역시  점을 존경했다. 개인적은 결함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굳이 따지지 않았다.


연수와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는 내내 영신과 밀회를 가졌다. 갤러리 모임이 끝나고 우연히 영화를 본 그 날 이후 공휴일이나 명절에 데이트를 하거나 둘만의 홈파티를 했다. 영신은 내가 연수의 작업실을 선택한 것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는 하차에 대한 유감만 표현했다. 다른 작가들이 텃세를 부린 것이라고 했다. 나도 내 주제를 본능적으로 알았고, 그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놔두는 것이 속편했다. 나를 빛나게 해주고 싶었다는 그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 따뜻했다.




영신이 팔베개를 해준 상태로 연수의 안부를 물을때면 기분이 이상했다. 연수와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영신을 배신한 것 같았다. 연수를 선택하고도 실패한 죄로 영신을 끝까지 몰래 만나야 하는 상황이 웃기고 슬펐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연수에 대해 누나 같은 우애를 가진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심한 척 하는 상황이 웃기고 슬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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