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 모든 장르, 장르파괴범
서재가 요람, 아니 요람이 서재인 줄 알았다. 만 1세 돌 무렵의 사진을 보고 있다. 같은 날 같은 집의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인형을 물어뜯고 있는 사진도 있었는데 그 사진을 찾지 못해 대신 가지고 있는 사진이다. 어쩌면 같은 방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사진에는 책(이것이 책이 맞다면!) 한권이 내 등뒤에 놓여있다. 피사체가 살짝 아래쪽으로 미끄러져있지만 이 사진의 등장인물은 나와 외삼촌이고, 이 사진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책을 가까이했는지 알 수 있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소설과 비소설의 차이는 몰랐어도 정기 간행물과 단행본(또는 완결된 시리즈)의 차이는 알았을 것이다. 아마도 1987년과 1989년 사이에 그런 관계들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서재가 사라지고 잠깐 어린이방(?)이 생겼다가, 모든 방이 통합된다. 이후에 유지될 내 방이 생긴 것은 1991년이다.
-미발행원고, <실천문학> 중에서
예정된 보상을 안 받을 수는 없었다. 순서는 이렇다. 무슨무슨 글쓰기 대회나 경필쓰기 대회나 그림그리기 대회가 열리면 저학년때는 최우수상 또는 대상, 고학년때는 후발주자(?)들과 경합하여 최우수상 또는 우수상을 받았다. 수학경시대회 수상률이 랜덤인 것에 비해 시, 서, 화의 수상률은 100%였다. 그림이 급속도로 어려워진 시점이 있었고 소박한(정말 소박했다!) 사교육을 거쳐 간신히 우수상이나 장려상을 받아냈으며 심지어 그때까지는 평생 특기였던 붓질을 유지하고자 특별활동까지 회화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학교에서 상을 쓸어오면 할머니가 상 한개 당 만원을 주셨다. 2024년 현재의 원고료 시세(?)를 생각하면....
가장 상을 많이 받았던, 아마도 1990년과 1992년에 상장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 상금을 내가 쓸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상징적인 의미(혹은 가족부양?)에 불과하고 실제로 나의 목표는 가능한 상위 랭킹에 오래 머무는 것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 가자마자 뭘 자꾸 시키는데, 점점 등수가 떨어지면 좀 부아가 난다. 그래서 회화에 남몰래(?) 매달린 것이다. 글씨나 글쓰기는 랭킹이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과학 독후감 쓰기 대회'는 정말 마지못해 억지로 썼는데도 상은 꼭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대회는 부작용이 있었다. 과학소설에 흥미를 느끼기도 전에 질려버린 것이다.
다행인 것은 6학년 때 새로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학교 대표로 교육청 출전 멤버에 뽑히다. 그것이 과학경시대회였다. 그 대회 이후로 30년째 이과를 고수하고 있다. 그 시절 어린이 버전의 과학소설은 유치했는데(!) 진짜 과학은 재미있었다.
서점과 인스타그램과 베스트셀러 코너에 교양과학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넘쳐난다. 모태 예체능, 유치원(을 다니지 않음주의)보다 효과적이었던 책육아를 거쳐 이공계 30년차, 과학고 탈락의 상처를 딛고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그럼으로 뒤늦게(?) 영포자, 수포자가 되어 오랜 기간에 걸쳐 회복했다. 마침내, 한글이었으면 지루해서 못 봐줬을지도 모르는 <이기적 유전자> 영어판을 읽게 된 것이 3년 전이다. 그러니까 30년 중에서 3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에는 이도저도 아님에 대한 무한 죄책감과 열등감이 있었다.
여전히 교양과학서 리뷰를 마주할때마다 분통 터뜨리지 말지어다, 라고 주문(?)을 외워야 한다. 분통의 근원은 모르겠다. 27년치의 묵은 열등감? 이런 교양과학서는 고등학교때 다 뗐고 지금 읽고 싶은 다른 책이 많은데 왠지 나가면 상을 탈 수 있는 대회를 안 나가는 것 같은 배아픔? 잘난척할 기회를 놓치는데에서 느끼는 심통? 뭐가 됐든, 어떤 책은 읽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굳이, 였던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단 책을 사도 순위가 계속 밀린다. 작년 생일 전후에 샀던 어마무시한 책탑 중에서 아직까지 깨작거리고 못 읽는 책이 다름아닌 교양과학서(그리고 <자기 앞의 생> 이건 왤까?)인 <암컷들>이다.
내겐 급선무가 아니다. 그러나 교양과학의 필요가 절실함은 잘 알고 있다. 사회에서, 특히 나보다 연령대가 높고 여성이 많은(이공계 비율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집단에서 기초적인 과학 상식이 부족한 경우를 종종 느꼈다. 그 분들도 지금은 책육아를 하시거나 건강 관련 채널을 반복 시청함으로써 척척박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요상한 분통과 비슷한 맥락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과학 자체에 대한 거리감이 있을 것이고, 그 거리를 좁히려는 작가들의 시도는 칭찬할만 하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유지 기간이나 중쇄 판수, 결국 판매량을 생각하면 저런 책을 써야 하나 싶다가도, 전공이 순수과학 100%도 아니고 아예 문과인 것도 아니라 그쪽으로 상상력이 뻗어가면 분통만 더 커진다. 대신 문, 사, 철에 대해 (다소) 주눅이 들었었던 청춘을 뒤로 하고 이제는 양보할만큼 잘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겸손하지 말지어다, 라고 주문을 외워야겠다. 내 전공을 침범당하는 것이 썩 즐겁지 않았기에 문과 선생님들 앞에서 나대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 나는 내 전공으로도 나댈 수 없음을 알았기에 끌리는 대로 읽고 내 방식대로 리뷰하겠다.
리뷰는 독자의 특권이다. 하지만 창작은 기반이 필요하다. 영감이 있고 창작욕구가 있으면 그냥 써도 된다. 하지만 사적 기록으로만 보관하고 쓴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지 않는(?) 모든 작가는 결국 읽히려고 쓴다. 나 이외의 독자가 접근 가능한 플랫폼에 내 글을 투척한다는 것은 읽어달라는 의미다.
대신,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
이미 글을 작성해서 게시하고 있다면, 읽어달라는 첨언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읽으라고 올린 것을 알겠는데, 그걸 다시 한번 읽으라고 권유하면 군더더기가 된다. 싸이월드부터 블로그 세 개와 페이스북, 그리고 살짝 각 잡은 인스타그램과 브런치스토리 외 다수의 세미프로 플랫폼을 거치는 동안, 클릭이나 구독을 해주시는 분들도 귀하지만 그 중에서도 정독이나 발췌독을 해주시는 분들은 더 귀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댓글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책 리뷰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나의 독서목록과 그에 대한 해석 능력을 바탕으로 같은 분야의 독자들과 계속해서 접점을 늘려갈 수 있으며 이 성장이 양적, 질적으로 계속될 때 내가 쓰는 글의 독자로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작욕구가 있지만 책 리뷰를 하지 않는 분들이 특히 같은 창작자들을 중심으로 소통을 할 때(잘 하시는 분들도 있다.) 진짜 독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확보할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스럽다. (오지랖이다.)
여전히 '저는 소설 쓰는 사람이예요.'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오글거린다. 의도하지 않은 더티마케팅일수도 있겠지만 '장르파괴범'이라는 컨셉이 생긴 덕분에 책 리뷰 혹은 픽션의 한 챕터에서 이것이 픽션이냐 에세이냐 리뷰냐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고로 나는 일주일에도 서너번씩 '이 시리즈는 픽션입니다.'라고 자백을 해야하고, 그 세월이 쌓이는 동안 '소설 쓰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을 자주 발표하고 싶은 만큼, 책 리뷰를 더 부지런하게 쓰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모두가 좋아하는, 아직 덜 알려진 작가들을 어서어서 홍보하고(오지랖인가?) 내 리뷰의 신뢰도와 가독성을 높여 더 많은 책덕후의 성지가 되기를 바란다. 오신 김에 소설도 읽어주시면 금상첨화죠.
오랜 영어 디깅으로 잊고 있던 본캐를 되찾았다. 결국 영어로 소설을 쓰겠다며, 영어권에 발을 뻗을 기회를 찾아 미국일주를 하고, 재작년까지 약 6년을 영어에 말그대로 '바쳤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로 소설에서 '소설'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 영어로 읽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으나 작년 한 해 영어책을 0.5권 밖에 읽지 못해서 올해는 시와 소설이라도 조금씩 자주 읽으려 한다.
그 0.5권이 <코스모스>였다. 나름 재미있었고, 미드 <화이트칼라>와 합이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강점은 문체가 수려하다는 것인데, 결국 이과부심(?)이 살짝 발목을 잡은 듯 하다. 지금은 조지 오웰의 <1984>를 읽는 중이다.
작년에는 가급적 소설, 여름 이후로는 한국 소설, 영어도 번역서 위주로 읽었다. 소설 인풋의 절대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리뷰 아닌 창작 소설을) 쓰려고 읽은 건 아닌데, 읽다보니 쓰고 있었다. 오히려 20년 전에는 충분히 읽고 (숙성시키고 리뷰하고) 축적하는 작업이 서툴러서 결국 창작하는 시스템을 개발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사이에는 의도치 않은 먹고사니즘 저서, 자세히 보면 예쁘고 문학적인(!) 과학 문제집도 있다. (깨알 홍보 아니고 자랑)
대학교 3학년 정도(?)에 정체돼있던 영어를 빨리 정복하려고 2019년에 원어민 과학 수업을 듣고 개인적인 보충 교재로 발견한 <영어로 과학>시리즈를 수집했다. 원서 읽기가 가능해진 2020년 이후, 몇몇 인생책들과 함께 고전문학, <사피엔스> 3부작, <이기적 유전자> 등 영어책만 30권 정도 읽었다.
영어로 읽을 수 있다는 쾌감이 정상수위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특히 프랑스어) 번역서와 한국문학도 어느 정도 리부트가 되어있었다. 특히 작년에는 거의 모든 스트레스 해소를 책 쇼핑으로 했는데, 어차피 영어책은 계속 쌓이기만 하니까 어쩌다 한 권씩만 넣고 나머지는 거의 소설, 가끔 에세이, 나름 치밀하게 줄을 세운 세계문학, 그리고 한국소설이었다.
리뷰를 써야하기 때문에 독서가 조금 우울했을 때도 있다. 상 받으려고 억지로 과학소설을 읽었을 때와 학점 따려고 교양 문학수업을 들을 때. 숙제로 나오는 텍스트는 좋았지만 숙제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셀프 숙제를 게임하듯이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긴, 숙제가 싫었던 이유는 내가 낸 숙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셀프 숙제라면 대체로 환영. 가끔 내가 나를 욕하기도 하지만, 정말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무엇을 읽을지 계획하고 계획을 조금씩 재구성하면서 읽고, 다 읽으면 리뷰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키보드를 꺼내고, 여유가 있다면 샤워를 하거나 잠을 자고 한번 더 발췌독을 하고, 리뷰를 쓰고 리뷰의 전파(?) 속도를 관찰하고, 다음에 리뷰할 책의 사진이 있는지 확인하고 사진을 찍고....
굳이 말하자면 이 작업은 수익화를 하지 않아야 더 즐겁다. 수익화 얘기를 볼 때마다 자기바보감이 드는 건 감수해야하지만(!) 이 또한 넘어서리라. 이 단계에서 수익화에 욕심내면 내가 진짜 읽고 싶은 책, 고전, 나의 코어로 직진할 수 있는 책, 고퀄리티 리뷰와 자꾸 멀어진다. (독서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나는 창작의 재료가 필요하므로 관련성을 고려하며 엄선한다.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고르는 데 힘을 쓴다.) 결이 맞는 책은 기한 내 협찬 리뷰도 할 수 있지만 스케줄을 벌릴 수 있는지 꼭 확인할 것!
다독의 기준은 다양하다. 자기만의 속도에 충실하되 비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독하는 리뷰어들 중에는 200권 이상을 읽는 사람도 있고 독서가, 책 리뷰어가 주요 정체성일 경우 일주일에 1권 이상의 속도로 읽는 사람이 많다. 한국어 90% 이상의 환경을 되찾은(?)지 1년 밖에 안 됐고 그마저도 브런치스토리에서 발행할 주제(주로 에세이)를 찍먹하느라 아직은 서평 발행 속도의 기복이 있다. 전업작가도 아니고, 전업독서가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계독을 좀 한다고 자부하고, 리뷰에 '책-배경-사람-미드' 등의 연결고리를 담아내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리뷰 속 미니픽션이 아바타에세이를 거쳐, 회고록으로, 회고성이 짙은 픽션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이제는 장르파괴범을 자처한다. 책에 관한 정보가 포함된 리뷰도 있고(특히 너무 갑자기 유명해져서 의외로 반감을 사는 책-주로 부커리스트), 책 내용은 스포라서 말할 수 없지만 평행세계의 회고록이 굵게 자리한 리뷰도 있고, 관련된 레퍼런스와 연결고리를 소개한 리뷰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책 그 자체를 자발적으로 리뷰한지 3년 밖에 안 됐다. (인스타그램은 여행과 예술 분야를 8년 동안 해왔지만 브런치는 이제 1년 4개월차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치트키처럼 써먹은 기술이 다름아닌 서평이었다. 게다가 그 3년 동안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서평단에 당첨된 것이 신기했던 1년차에 열정이 넘쳐서 3만자를 쓰다가 서평 못쓰는 병에 걸리고, 한동안 영혼없이 숙제만 겨우겨우 하다가 갓생을 다짐하며 2천자를 (자주) 쓰기로 스스로와 계약했다. 그게 2년차였다. 할말이 많거나 순서가 꼬여서 브런치에 초고를 작성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리뷰는 2천자 내외로 끊거나 압축한다.
그 후 2년간 책이 안 읽히긴 했어도 리뷰가 안 쓰이진 않았다. 인용문이 적어도 전체 분량 1,800자 이상은 된다. 인용문이 많으면 초창기에는 댓글로 넘어가기도 했고 (인스타그램은 2,150자 내외만 본문에 실을 수 있다.) 지금은 인용문을 최대 1천자까지 압축하고 나머지 1천자를 활용해 내 글을 쓴다.
그땐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고 살았으나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작년에 재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무려 40년이 넘은 고문서였다. 우리 외삼촌은 이런 책들이 나오자마자 구입하(거나 협찬받)는 얼리어답터였다. 집안의 유일안 아이(=나)가 태어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어린이용 책을 모으고 있었다.
내 방으로 헤쳐모인 어린이 책은 다시 사촌들의 방으로 이동하고 이동하다 어디론가 사라졌겠지만 이렇게 오래된 책은 차마 90년대생인 동생들에게도 닿지 못하고 내 손 안에서 바스러져가는 중이다.
그리고 <실천문학>이 있었다. 어쩌면 만 4세에 돋보기를 써야했던 이유일지 모르겠는 어른 책들. 그러니까, 동화책이야 내가 0살때 출간됐거나 그 직전에 출간됐어도 내 책이라 우겨볼 수 있는데 어른 책은 그렇지 않다. 지금 본가에 있지만 원래 주인을 할 수 없는 70년대 판본(세로쓰기!)도 있고,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책등테라피 돌사진 속에 등장하는 책도 있고, 흐릿한 기억속에만 남아있는 책들.
현대 뇌과학에 의하면 말문이 트이기 전까지, 아마도 언어적으로 귀가 뚫리기 전까지? 시각으로 압도적인 양의 인풋을 한다는데, 대체 얼마나 책을 봤기에 (증거1: 2개월때 이미 자기소유의 책이 있었음) 한참 쫑알쫑알할 나이에 벌써 돋보기를 썼을까?
(팩트: 지금은 근시+난시다.)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그 사진을 찾아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