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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y 17. 2024

거대한 농담같은 뫼비우스의 띠

밀란 쿤데라 <농담>

​만일 우리가 서로를 배반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함께 이 결혼을 치르는 이 사람들 모두를 배반하는 것이고, 옛 시가 광장의 집회와 토글리아티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나는 파벨에게 여러 번 말했다, 지금은 참 웃음이 난다, -33p




파트와 챕터가 많고 책장이 유난히 잘 넘어가서 방심하고 있었다. 연초에 리뷰 계획을 세웠으나 거의 손대지 못한 채 다른 책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읽다보면 먼저 완독하는 책이야 많고 많으니) 그렇게 밀리고 밀려있던 <데미안>에게까지 밀려서 결국 설날 기념 리뷰는 노동절 기념 리뷰가 돼버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책탑 포스팅이 충동적이었던 것처럼 이번 포스팅의 지연은 예상불가한 불면증과 기절 혹은 숙취의 조합 같은 것이었다. 금요일 밤에 읽고 토요일 오전에 리뷰하려던 마지막의 마지막 계획까지 처절하게 배반하는(?) 그런 우발성.




내 마음의 슬픔으로 나는 이 혼례 축제의 열기 속에 섞이지를 못했고, 그래서 이 조상 전래의 행사라는 맑은 샘물 속에서 얼핏 클로로포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81p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122p


그는 그 시절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과시하고 다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미래 자체와 어떤 비밀 협약을 맺어 그 이름으로 행동할 위임장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234p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250p




우발성 혹은 우연성은 우리에게,


루드비크와 루치에에게, 야로슬라프에게, 누구보다 코스트카에게 비극적인 농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위트를 남긴다. 이렇게 루치에와 헬레나와 블라스타를 이용한다고?


​여성 인물들의 전사前史와 이후 행동이 너무 예상되는 클리셰로 인해 한탄이 모든 장면마다 이어지지만 엄격하되 꽉 막히지 않은 코스트카, 분량이 많은 만큼 반성도 많이 하는 루드비크의 내면성찰은 헬레나와 야로슬라프를 거쳐 하나의 거대한 농담같은 뫼비우스의 띠를 완성한다. 버림받은 루드비크는 여성들을 치유와 복수의 도구로 바라본 대가를 아주 톡톡히 치르는데....




이 횃불들은 진짜 횃불이 아니라 다만 '횃불의 패러디'며, 그것이 장엄하게 받쳐들고 있는 것, 즉 분홍빛 기쁨의 그 덧없는 흔적은 진짜 쾌락이 아니라 '쾌락의 패러디'며, 그것은 이 먼지 도시의 모든 횃불과 쾌락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패러디적 성격을 아주 그럴듯하게 나타내 주었기 때문이다. -279p


​그러나 육체가 자신의 영혼과 결합하고 일치를 이루어 정념을 공유하는 일은 천배는 드문 일이다.

-327p


​죄의 사함, 이것이 바로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 루드비크, 당신에게는 불가해하고 알 수 없는 저 신비로운 정화. -387p


그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녀 혼자만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 -416p




​빠져들듯 빠졌던 샛길에서 만난 <이중 작가 초롱>을 읽다가 기시감이 들어서 <농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농담>의 리뷰를 한번 더 미루려다, 묘하게 겹치는 역사의 그림자를 느끼고 지금이야말로 <농담>을 읽을 때! 라고 (속으로) 외친 것이다.


패러디의 패러디. ​돈 키호테가 연상되는 이 사람은 어디서 본 것 같고(누구죠?) 뫼르소가 연상되는 저 사람은 당분간 안 보고 싶다.




​그들이 나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나는 흐뭇했다. 나의 가난한, 고아 같은 그 세계에.

-424p


​하지만 샘물은, 그것은 조직되는 것이 아니에요.

-445p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 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 가겠는가. -460p




쿤데라에게 애정이 있는 독자라면 이미상을 통해 

'지금, 여기' 농담을 알아차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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