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파라노이아가 발생시키는 감산주의가 위태로운 미니멀함과 우아함이라면, 그 반대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모든 짐을 이고 나르며 물건들을 우르르 떨어뜨리는 이 세번째 여자처럼 말이다.
-파라노이아 비평을 넘어(오은교),
계간지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먼 훗날, 숨넘어가기 직전, 누군가 오늘에 대해 묻는다면 목경은 이 이미지만을 기억할 것이다.
-281p,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젊은 작가상 수상작 중에서 '젊은 근희의 행진'만 보였던 작년에는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이하 '모험')이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쳤고 연말연시에 손대기 시작한 계간지를 통해 이 존재감 흐릿했던 단편의 스포를 단기집중적으로 흡수하여 나도 모르게 이미상을 보고 싶어 안달하는 지경이 됐다. 실제로 '모험'이 보여준 겹기억의 세계는 평론 안에 첨부된 핵심 문장과 해설을 보고 상상한 것보다 순한 맛이었고(대체 뭘 상상한 거야? 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소설과 관련한 컨텐츠를 '먼저' 섭렵하는 동안 정작 소설 그 자체를 읽지 않으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손보미의 '불장난'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모험'을 다시 읽고 아직 모르는 행간의 의미를 미래에 느끼려면 어서 빨리 이와 관련한 기억들(스포와 덕질)을 잊고 덮어쓰기 해야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지난 봄 내내 이미상과 손보미를 '아껴' 읽었다. 특히 이미상은 단독 소설집이 한 권 뿐이고 총 8편의 수록작 중에서 구입 직후에 읽은 '모험'을 제외하면 해설까지 총 8편이다. 여러 번 읽은 작품은 어쩔 수 없이 해설이었는데, 한 계절만에 최애작가로 우뚝 선 이미상(그 이름, 미상이여-)의 신간 소식을 벌써부터 기다리면 지칠 수 있기에 마음을 다잡는 동안 전승민 평론가의 신간 소식이 보상처럼 귓가에 맴돌고 있다.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두 편의 수상작과 표제작을 제외하고도 묵직한 주제를 일상적(혹은 덕후적) 언어로 가닥가닥 풀어주는 이미상의 글맛에 반하면 출구가 없다. 거의 모든 작품이 글쓰는 사람의 결정적 순간들(창작과 비평이란 무엇인가!), 금기에 대한 처절하되 (특히 한국에서 저평가된) 유머를 잃지 않는 폭로, 언어 감각과 독서량을 보증하는 어휘력 또는 조어력(여자 박스!)까지 종합선물세트같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데....
어느 달엔가는 '유채밭 사랑 문예 공모전' 수상 작가도 초롱, '근린공원과 영적 체험' 가작 작가도 초롱, <문학3> 투고 선정작 작가도 초롱, '배민 백일장' 장원도 초롱이었다. 뽑고 보면 초롱이라 대회 주최 측과 출판 관계자들도 난감해한다고 했다.
-90p, 이중 작가 초롱
그러니 이 싸움은 무한의 집을 지켜 얻는 것과 잃는 것 사이의 싸움일 테지. 얻는 것은 보잘것없어. 그리고 뭘 잃을까. 잃음의 끝은 뭘까.
-136p, 여자가 지하철 할 때
겨우 밤뿐이었다. 어떤 루틴을 축 삼아 밤을 보낼 것인가, 그녀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남자가 침범한 건 바로 그 시간대였다. -170p, 티나지 않는 밤
보이와 사장은 참회하고, 보슈와 매키트릭은 추리하는데, 나는 샌드위치가 된다. 구남 O는 선언하고, 사장은 전두환을 발견하는데, 나는 샌드위치가 된다.
-212p, 살인자들의 무덤
처음에는 남이 나에게 했던 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색무취였던 말이 뒤늦게 악취를 풍겨 때늦은 앙심을 품게 했다. 그러다 다행히-계속됐다가는 유치원 시절 문방구 아주머니를 수소문해 칼을 들고 찾아가게 된다-점차 내가 남에게 했던 말 때문에 괴롭게 되었다. -234p, 무릎을 붙이고 걸어라
혁명의 불빛 이면에 가리어진 것, 혹은 혁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우리가 묵과하거나 외면했던 것들을 이미상은 거침없이 드러낸다.
-318p, 해설_혁명의 투시도(전승민)
이미 다른 글에 인용당한 문장도 있고 문장 단위로 설명이 안 되는 작가라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핵심문단 내 핵심문장, 혹은 무심한 척 던지고 도망가는 웃참포인트만 추려서 선보인다. 만약 내가 이 부분을 썼다면 소름 돋았을 그런 장면들.
하지만 이미상의 매력이 궁금하다면 가급적 스포없이 책 전체를 (음미 혹은 그보다는 적어도 내적 투쟁을 하면서) 읽기를 권한다.
저자는 미상이면서, 우리 모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