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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ug 29. 2024

허세면 좀 어떻습니까?

복선에게 독서는 쾌락이다. 또한 마음속 깊은 곳에 품은 이민에 대한 욕망,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동기부여를 해주는 일종의 보양식이다. 어떤 책은 체질에 맞는 한약처럼 두고두고 활활 타오르지만 어떤 책은 에너지드링크처럼 반짝 떠오른 뒤 잊힌다. 복선에게 아직 무대욕구가 조금은 남아있듯이 강유에게도 어떤 예술적 의지가 조금은 남아있다. 강유는 쾌락독서와 시야를 확장하는 정보수집으로의 독서를 거쳐, 철학과 문학으로 돌아왔다. 국어 교과서를 진심으로 정독했던 그때처럼 진지하게 고전을 읽고 매의 눈으로 미래고전을 찾아내는 중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의 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히는 작품보다 새로 발굴되는 작품이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디지털 문서가 파괴되는 디스토피아적 재난이 와도 종이책은 건재할 것이다. 그 상황을 가정해 보면 강유는 머릿속에 도서관이 있어서 안심이 된다. 대재앙의 범위가 달라져도 종이 문서만 파괴될 가능성은 적다. 종이만 골라서 태우는 불이나 종이만 골라서 적시는 물이 있지 않는 이상, 종이책이 파괴될 때 전자문서도 함께 파괴될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인공지능이 얼마 안 되는 초보 독서가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러나 지적인 독서를 꾸준히 했고 자신의 분야의 텍스트를 놓치지 않는 편이라면 인공지능에 겁먹을 이유가 없다. 복선은 사람이 한 번역도 못 미더워서 원서를 읽다가 최근에는 원전 이상으로 훌륭한 역서를 펴내는 역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과도기를 겪는 중이다. 여전히 인공지능 번역은 매번 실망스럽다.


​강유는 비문을 가려내는 건 물론, 말투에 담긴 심리와 작성자의 배경지식까지 읽어낸다. 총명한 어린이의 단순한 마음이 읽히는 글은 차라리 좋다. 정신이 육체의 세월을 따라가지 못하는 늙은 아이들의 칭얼거리는 말투는 견디기 힘들었다. 누구나 지적 허영심은 있다. 그래서 잘난 척을 할 거라면 화끈하게 하길 바랐다.




​복선은 영어 컴플렉스 가득한 한국사람들에게 영어로 말하거나 영어에 관한 말을 하는 게 언제나 오글거린다. 모두가 자기 발음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어떤 사회적 본능에 의해 타인의 발음을 평가한다. 발음이나 억양에 주눅 들지 말고 자신 있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데 말하기보다 듣기에 집중하면서 눈치를 보게 된다. 가청범위에 몇 명이 있던, 자신을 제외한 한국인이 한 명 이상 있다면 누구나 그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여행을 가거나, 홍대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와 2인 대화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다행이다. 그 경험을 쌓고 또 쌓아도 한국인이 포함된 대화의 불편함을 이겨내기 어렵다.


복선은 미국에서도 한국인이던 유럽인이던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말할 기회를 놓치다 보니 혼밥을 할 때도 원래 스타일대로 키오스크를 사용했다. 여행을 더 자주, 더 멀리, 더 혼자 다녀보니 점점 웨이터나 캐셔들과 소통하는 요령이 생겼다. 대도시와 대학교 위주의 여행을 준비했었고 어학연수 목적이 당연히 있었다. 막상 여행 속 일상생활에서 회화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국도 지금은 널린 게 키오스크이다. 그런데 5년 전에도 모바일이나 최소한의 바디랭귀지만으로 필수 주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아, 인터넷 쇼핑이여!) 스몰토크는 지금보다도 적었을지 모른다. 아마 낯선 이와의 대화량은 팬데믹 초기에 가장 적었겠지만 2024년 현재와 팬데믹 이전을 비교해 봐도 과거의 우리가 말을 더 많이 한 것 같지는 않다.  


발언권이 있고, 말을 해야 하는 업무를 맡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고도 살아간다. 친구와의 수다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도 낯선 이와의 대화는 거부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게 업무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고객이나 거래처, 친구가 아니라면 왜 말을 섞어야 하겠는가. 그런데 영어 원어민에게는 그런 방어막이 훨씬 투명해진다. 다만 이 경우에는 방어막이 타인보다는 자신을 향한다는 문제가 있다. 정작 현지의 주민들이 살갑게 스몰토크를 걸어와도 당사자인 복선이 리액션 이상의 수다로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어간 적도 있으나, 지금까지 그녀와 친구로 지내는 외국인 중에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는 없다.




영어공부 기록으로 블로그를 하겠다고,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에 못 미치는 계획만 세운 지가 벌써 9년째다. 복선은 우성의 블로그를 관전하면서도 귀차니즘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드 대사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중급자에게는 들려도 무용했던 고급 이디엄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 부분을 받아쓰기 한 뒤 번역해서 개점휴업 중이던 블로그에 게시했다. 이걸 우성에게 자랑하려고 이틀 동안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언니, 근데 언니 책 사진 찍을 때 민망한 적 있어?”

“당연하지. 카페에서 우아하게 독서하다가 갑자기 책 사진 찍는다고 앉았다 섰다 해야 하잖아.”

“난 단톡방에 책 사진 올렸더니, 자랑용 사진이래.”

“사진은 솔직히 다 자랑용이지. 겁나 못 찍어야 그냥 기록용이라고 부르는 거고.”

“맞아, 맞아. 못 찍은 사진 올리고 좋아요 받고 싶어 하는 심리는 뭘까?”


복선은 여전히 백치미를 뽐내는 얼짱들이 관심받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우연히라도 보게 되면 부아가 났다. 딥페이크 이슈에도 꿋꿋하게 성인모델 뺨치는 에로틱한 사진과 영상으로 팔로워를 불러보으는 셀럽들도 있다. 차라리 성인모델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정직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괜찮은 모델 지망생이라 해도 소셜미디어 경력이 없으면 팔로워 숫자가 귀엽다 못해 민망할 정도로 적다. 복선 자신은 수영복 사진을 아껴 올리는 중이다. 영어 인플루언서 중에도 아낌없이 몸매 자랑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와 별개로 몸매가 좋은 일류대 출신 연예인도 있지만 그렇게 종횡무진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일단 끼가 있고 뻔뻔해야 하며, 자기 전시를 함에 있어서 지나친 검열을 하지 않아야 한다.


예쁘고 똑똑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 혹은 우성의 자신감은 타고난 외모나 지능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살아오면서 자신의 한계를 늘려온 경험이 자랑의 질을 결정한다. 복선은 여전히 자신의 성취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나마 성취한 것들도 전시하는 기술이 부족함을 느낀다. 우성을 통해 전수받을 수 있는 부분이 특히 후자다.  

 

“근데 자랑하는 게 나쁜가?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인데.”

“있어 보이려고, 젠체하려고 시작하면 좀 어떻습니까?*”


한때 어디를 가도 내부자가 되어야 직성이 풀리던 강유는 이제 자신의 내부에 집중하는 중이다. 강유는 자신이 검색하기 쉽도록 블로그에 고전 목록이나 여행 사진 등을 정리해두긴 하지만 그녀의 포스팅이야말로 기록용이었다. 가끔 우성이 포스팅 제목을 바꾸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강유는 검색 노출에 별 야망을 두지 않았다.


“언니도 나중에 카페 홍보하려면 언니 블로그를 키워야지.”

“너가 홍보해 주면 되지 않을까? 평생 협찬해 줄게.”

“아니, 그래도. 사람들은 사장님이랑 소통하고 싶어 할 거라고. 언니 카페가 핫플이 되면 더 그럴 거야.”

강유에게도 전시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강유 자신과 복선의 게으름을 고려하면 우성에게 본격적인 블로그 수업을 요청하기보다 일단 각자가 직접 부딪혀보고 살살 피드백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성은 블로그를 하기 전에도 머릿속에 타자기가 끊임없이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뼛속부터 블로거들은 머릿속이 항상 바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우성은 영화, 영화적 시공간과 사건, 원작 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쉬지 않고 분석하는데 그 분석 과정에서 뽑아내는 (아직 머릿속에만 있는)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독자를 염두한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우성은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소셜미디어를 치밀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중에 하나는 열심히 할 줄 아는 사람과 말이 통한다. 그래서 복선이, 특히 강유가 본격적으로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우성에게 복선과 강유는 동료에서 친구로 막 진입한 사람들이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강유는 그 마음을 알지만 그로부터 우성이 실망하게 될 결과도 예상한다. 아무리 옆에서 부추겨도 당사자가 추진력을 가지려면 더 강력한 동기부여를 받아야 하는데 고집이 센 복선이나, 스포트라이트에 흥을 잃은 강유 자신에게 그런 계기가 온다면 정말 우연히 찾아올 걸 알았다.


그 우연이, 생각보다 빠를지라도.     



(계속)





*한동일, <라틴어 수업>, 흐름출판, 2017

**권호영, <한 달 만에 블로그 일 방문자 수 1,000명 만들기> 개정판, 푸른향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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