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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ug 26. 2024

욕망의 독서치료

​우성은 어렸을 때 공중파 드라마에서 생략된 장면에 무한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의 서재를 겸한 자신의 방에서 자연스럽게 독서목록을 확장하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드라마에 나올 수 없는 장면이 언어로 묘사된 책도 있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우성은 자신의 판단에 의해 그런 책들은 다른 책 사이에 끼워서 몰래 보거나 집에 아무도 없을 때만 봤다. 그리고 그런 책 속에 나오는 새로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사전 속 단어들이 스스로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것을 지켜봤다. 언젠가 복선이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할 때 그런 방식으로 사전을 활용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고, 그때 우성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왜 그런 책이 재미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도 재미있긴 하다. 그뿐인가, 우성이 영화덕후로 거듭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피에르 쇼데를로 라클로이다. 우성은 2000년대 한국영화,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헝거 게임> 시리즈를 비롯한 블록버스터 영화와 독립영화 및 아리송한 유럽영화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어쩌면 스타일보다 시나리오에 매료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피에르 쇼데를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는 1782년작 프랑스 소설이며 동명의 영화로 수차례 제작되었다. 같은 시나리오인 것을 알기 전에 만났던 영화가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였다. 그보다 조금 앞서 등장한 할리우드 하이틴 (치정) 로맨스인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은 케이블 방송 영화채널에서 봤다.


“언니, 근데 나 이번주부터 블로그 시작했어.”


​강유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복선이 블로그 얘기를 꺼내는 순간, 상념이 깨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복선에게도 포스팅하려고 쌓아둔 작품목록이 있다고 했다. 우성은 복선을 매료시키는 작품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바로 그 이유로 다시 한번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대놓고 치정을 밝힌다고는 절대 밝히지 않을 복선, 그럼에도 패셔너블한 미드라면 아낌없이 섭렵하고 있겠지.


“이번 추석 때 정주행할만한 미드 추천 어때?”

“오, 그거 좋은데? 나 일단 ‘가십걸’ 포스팅해봤어.”

“나는 조금밖에 안 봤는데 그거 ‘위대한 개츠비’랑 비슷하다며?”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안 봐서 모르겠어.”


복선에게 놓여난 틈에 잠시 휴대폰을 갖고 놀던 강유가 고개를 들었다.


“너네 그거 다 책인 거는 알지?”

“개츠비는 화장품 브랜드 아냐?”

“아이구, 복선아.”

강유가 한탄하는 틈에 우성은 웃음을 참았다. 허세와 해맑은 무식함이 공존하는 복선을 볼 때마다 차마 대놓고 웃지는 못하겠으나, 이번에는 웃을 처지도 아니었다. 자신이 보다 말았던 ‘가십걸’ 역시 원작이 책이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언니, 가십걸도 책이야?“

”어. 나 그거 킨들로 보다가 중고서점에서 샀어.“

”읽었어?“

”아니, 영어라서 1챕터만 읽었어.“

강유는 복선을 만나거나 떠올릴 때면 쌓아둔 영어책이 함께 떠올라 죄책감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중고서점에서 영어책을 사모으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영어책은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니까. 하지만 강유가 최근에 집중하는 장르는 동시대 소설이다. 동시에 고전 소설 목록을 비교대조하여 쇼핑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일종의 평생과제다.


“아, 맞다. 개츠비 쓴 사람이 피츠제럴드야?”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 ‘가십걸’ 남주가 나오는 다른 드라마를 봤는데 거기에 피츠제럴드가 나오더라고.”

“오, 진짜? 제목이 뭐야?”

“넷플릭스 오리지널인데 ‘너의 모든 것’일 걸?”

“그거 좀 무서울 거 같음.”

“나도 처음에 좀 그랬는데, 어느 순간 빠져들어.”

“넌 원래 호러 스릴러 좋아하잖아.”


​복선은 복수서사를 특히 좋아했다. 복수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화끈하게 빌런을 뭉개버리는 스릴러 소설이나 에피소드마다 범인을 잡아서 감옥이나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미드를 보다가 진지하고 철학적인 사실주의 작품을 접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언제부턴가 아무리 성공담이어도 실화 바탕 소설이나 영화는 거의 안 보게 됐다. 다큐멘터리는 말할 것도 없다.


“난 결말이 확실한 게 좋아.”

“열린 결말 싫어?”

“응. 요즘엔 수사물에서 범인이 죽는 게 좋아.”


강유도 스릴러에 심취했던 시기가 있다. 집에 가서 범죄 소설을 읽기 위해 하루를 견디던 날들. 그러나 현실적인 소설에서 위안을 느끼게 되면서 다른 맛을 알아버렸다. 그러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어떤 사람들은 에세이에서 위로를 받는다지만 에세이의 스펙트럼은 너무 넓다. 소설도 소설 나름인데 읽다 보면 결이 맞는 작가들이 생겨서 그런 작가를 찾아내고,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상황이 다르더라도, 공감할 수 있고 비슷한 리액션이나 언어유희를 하고, 그걸 자신의 작품으로 박제하는 작가들을 보면서 내적친밀감을 적립했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판타지 세계관을 바탕으로 물랑루즈한 공간을 설계하고 있던 강유도 요즘엔 극사실주의적인 풍경에 안정감을 느끼게 됐다. 주변은 올드타운인데 홀로 모던한 카페보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분식집이 편하다던지. 다만 우성과 복선은 여전히 힙한 공간을 선호하기 때문에 밥 한 끼를 먹더라도 인테리어의 최저 등급을 고려해야 한다. 강유는 점점 혼밥이 좋아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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