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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14. 2024

하고 싶지 말고 하세요

여름을 좋아하는 복선도 올 여름은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가을을 좋아하는 우성은 아직 더워서 물들지 못하고 열매만 뱉어내는 은행나무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같은 극장으로 출근하지만 복선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우성은 토요일과 일요일만 근무하기 때문에 함께 일해본 적이 없다. 우성이 영화를 보러 오는 평일 밤에는 이미 복선이 떠나고 없다. 강유는 지난주에 퇴사했다. 우성은 영화를 보러 굳이 여기로 오게 되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프랜차이저 극장의 다른 지점 투어를 해도 될 일이었다. 그동안 강유와 저녁을 먹으려고 일부러 여기서 영화를 봤다는 걸 인정할 때가 됐다. 더 솔직하게 (스스로에게만) 인정해보자면, 강유가 복선과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평일에도 그들 공통의 직장으로 나온 것이다.


우성은 복선의 옆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복선을 만나려고 극장에 오는 날이 있을까? 또는 오늘처럼 복선과 단둘이 걸을 일이 있을까? 왠지 예감이 안 좋았다. 오늘은 강유의 퇴사 파티를 하려고 복선과 우성이 강유의 단골 와인바에 미리 잠입하기로 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그곳을 처음 방문한 우성이 사장님의 명함을 챙겨두었다가 어제 저녁에 전화를 해서 오늘 오픈 직후에 방문하겠다고 예고했다. 강유에게 얼핏 듣기로는 와인바 사장님이 강유 삼촌의 먼 친구랬나 강유의 먼 친척이랬나 그랬다. 복선은 강유의 원래 근무시간을 피해 퇴근시간이 지나서 갠톡으로 확인했다.


-언니 퇴사한거 우리만 알아?

​-그런 셈이지. 난 누구랑 근황토크 잘 안해.

-친구들도? 동네 친구들 없어?

-동네 친구 누구?

-아, 하긴. 알았어. 이따 봐.


​우성이 강유의 저녁 시간을 섭외해두었고, 그날은 강유가 처음으로 출근 안 하는 날이라 복선도 초대하자는 제안을 우성이 먼저 했다. 그리고 약속시간 두 시간 전에 복선을 미리 만나서 어떤 파티를 할지 상의하고 강유의 집 근처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강유가 도시익명성을 중시한다는 걸 우성은 새삼 깨달았다. 대학교 진학을 계기로 상경한 우성은 서울에 아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조금은 질척거렸고, 상처받았으며, 조금은 마음을 닫았고, 그럼에도 외로웠다. 본가 옆동네에 살고 있는 복선은 부모와 자주 통화하지 않아도, 산책하다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이 자신의 근황을 업뎃하고 있으리라 짐작하며 집 근처에서는 ‘엄마가 보고있다’ 모드로 적당히 단정하되 적당히 반항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웃들에게 괜찮은 젊은이지만 내 딸이 아니어서 다행일 정도로, 며느리 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강유는 카페를 창업하고 싶은데 실무 경험이 없는 동아리 선배가 준비중인 카페의 매니저로 섭외되었다. 아직 인테리어의 막바지여서 강유가 할일은 메뉴와 장비, 재료 등을 알아보는 것인데, 사장이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들은 조사만 한다. 가급적 사장 언니에게 직접 거래처에 연락하거나 찾아가라고 조언하고 있다. 정식 월급은 영업시작일부터 받을 예정이고, 그 전에 강유가 사장 대신 업무 연락이나 출장을 가게 되면 미리 상의한 시급을 계산해서 첫달 월급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집에서 조사를 하면 따로 청구하지 않지만 외부에 있을 때는 상황에 따라 소정의 출장비를 청구하기도 했다.


강유는 자신의 노동력으로 환산되는 금액을 보면서 창업에 대한 회의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출퇴근과 생활에 필요한 재생산 비용에 민감한 강유는 익명의 직원이라 해도 인건비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빨래는 누가하고 전기세는 누가 내겠는가!) 게다가 그 직원이 자신이라면 사장이 오히려 돈을 버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걸 혼자 하고도 손익분기점이 언제 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사장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사장이 아니라 다행이다. 무슨 일이, 특히 돈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강유는 걱정과 동시에 안도했다.  


‘창업은 무슨.’


망한 삼십대를 일으킬 방법이 창업 뿐이라고 생각해 온 강유의 세계관도 일대 위기를 맞았다. 복선의 카톡을 보고, 그보다는 카톡을 열면 메시지와 함께 막 도착한 복선의 프사가 나오는데 그로부터 복선의 아우라를 소환하고 또 한 번 망연자실해진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데.’


강유는 주로 생각만 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매주 이 생각을 말로도 한다. 강유가 자주 하는 말이 ‘생각을 말로 하지 마.’인데 그건 복선과 우성이 서로에 대한 생각이 말에 스며들 때 둘 사이가 팽팽해지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무시하는 언어들. 혹은 상대방의 진심을 간과한 자기 중심의 표현들.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도 상대방은 진심으로 부럽고 존경할 수 있는데, 그럴 때 자기 비하는 치명적이다. 그걸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상대방은 뭐가 되겠는가.


​“언니도 하면 돼.”


복선은 매번 말한다. 복선이 자주 하는 말은 ’하고 싶지 말고 하세요, 제발.‘이다. 복선 자신에게도 자주 한다. 그나마 복선은 우성을 만나서 각성했다. 블로거 지망생에서 블로거로 재탄생했고, 적어도 이제는 유학준비하는데…하고 말끝을 흐리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그런 복선이 부러운 자신에게 종종 분노하면서도 강유는 여지껏 영어공부를 개시하지 못했다.




복선에게 자주 분노하는 우성의 심리를 떨어져서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유 역시 공감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알아야겠다. 우성을 부러워하는 복선의 심리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자기반성이 가능하다. 우성은 꼼꼼한 (약간 통제광인) 블로거라서 충분한 성과를 보이는 중이고, 그건 게으른 (약간 허세왕인) 복선과 (약간 해탈한) 강유에게 부족한 자질이니까. 그리고 복선과 강유 역시, 우성의 그런 점을 본받기로 이미 합의(?)했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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