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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10. 2024

시장조사에 미친 여자

간밤의 꿈은 좋으면서도 불길했다. 게다가 환절기와 함께 불면증이 돌아왔다. 이번주 내내 강유는 출근을 서너 시간 앞두고 겨우 잠들어서 겨우 두어 시간 자다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발이 시린 계절이 왔다.


어제도 잠이 안 와서 멍한 스크롤을 하다가 이상한 뉴스를 봤고 궁금해진 김에 좋아했던 아이돌의 뒷조사를 했다. 그래봐야 이렇게 말 많은 셀럽을 캐는 일은 나무위키를 통독하는 정도이다. 대학영어 교재에서 발견한 스키밍이라고 해야 할까. 강유는 PC나 휴대폰으로 기사 등을 읽을 때 정독을 하지 못한다. 종이책이라고 해도 패션지를 정독하지 않듯, 장르의 한계(?)도 있지만 화면으로 읽으려면 스토리가 더 매력적이어야 했다. 종이책도 딴생각과 딴짓의 방해를 크게 받지만 책갈피가 점점 뒤로 가는 그 쾌감이 있다. 전자책으로는 그 맛을 느낄 수가 없다.


훑어본 것은 읽은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정독하지 않은 것. 소화하지 않은 것. 정독의 조건은 소화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정독이 불가능하고, 아주 오래 걸린다. 그래서 다독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존경스럽다. 뭐, 이해의 기준이 다를 수도 있지. 강유는 자신이 정독한 책에 있어서는 저자 혹은 해설자처럼 분석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며칠 지나면 이 책을 정독했다는 사실 이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기억은 인덱스와 몸이 대신한다. 어떤 책을 읽었다는 기억은 그 책이 안내한 간접 경험을 상상하면서 아련했거나 소름 끼쳤던 것으로만 남아있다. 인덱스를 잔뜩 붙여둔 페이지를 여러 번 읽어도 단 한 줄도 암기하지 못한다. 살다 보면 암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강유는 특히 텍스트를 암기하지 못한다. 강유가 암기하는 가장 긴 텍스트는 자신의 가장 오래된 계좌번호이다.  




창업을 준비하는 동안 마음의 드는 동네라면 몇 시간이고 골목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십 대 시절부터 화장품을 너무 좋아했던 강유는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으면 그 브랜드의 모든 제품이 수록된 카탈로그를 유심히 봤다. 가끔은 정독도 했지만 주로 제품 관련 책자는 모든 사진을 다 보는 것으로 정독을 대신한다. 패션지나 도록, 그리고 인스타그램. 사진으로 정독을 대신할 수 있는 매체가 편하다.


한 번 본 사진을 전부 다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진이나 실물, 도식화된 콘텐츠는 빠르고 쉽게, 게다가 오래 기억한다. 한때는 강유도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속의 미술, 인테리어에 머물고 싶었다. 가사는 한 소절 이상 기억할 수 없어도 멜로디는 기억했다. 하지만 멜로디도 텍스트였다! 서른이 넘어서야 그걸 깨달았다. 멜로디도, 춤도 정확한 루틴을 암기하는 것보다 핵심 요소와 분위기로만 기억한다.


기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가? 이해하지 못하면 읽을 수 없고(문장이 어떤 글씨로 쓰여있는 건 알겠는데, 입력이 안 되고 바로 증발한다. 비문이나 헛소리도 그렇다.) 이해하면 정독하지만 문장을 암송하는 게 아니라 그 문장을 통해 상상해 낸 이미지를 자기 방식대로 기억해서 재구성한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대부분의 시험에서 최상위 성적을 받았고 (특히 논술형!) 사는 데 불편함은 1도 없다.


다만 함께 지내기 즐거운 사람들은 학습력이 훨씬 왕성하고 책도 빠르고 많이 읽는데다 암기까지 잘하기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았다. 강유의 절친은 거의 다 암기왕이었다. (법학 전공 많음주의)


나만 바보인가. 그런데 성적이 비슷하네? 그럼 천재인가. 매우 헷갈리네? 강유도 시청각 자료가 병행된다면 인풋이 바로 아웃풋이 될 정도로 강력하게 자리잡는다. 방금 들은 강의를 다름 교시에 다른 버전으로 할 수 있는 정도? 그러나 너무 순수한 텍스트, 종이 위의 개미들은 읽는데 하세월이 걸린다. 그럼에도 강유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신기하지?)




강유가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강유는 자신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상황이나 사건을 끊임없이 속으로 재구성하고 가끔 신들린 것처럼 그에 대해 쓰기도 하고 가끔 (관계자가 아니라 안전한) 엉뚱한 사람에게 랩 하듯이 떠벌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것 같다. 그런 맺힌 이야기들은 몸에 새겨져 있고 방심하면 흘러나온다.


비주얼 러너인 강유는 이미지를 활용한다. 텍스트를 그대로 저장하지 못하기에,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는 탓에. 입말로 인풋 되는 강의나 영상 매체는 그 순간에 몰입한다면 몸에 새겨지지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섀도잉이 싫다. 같은 말을 여러 사람이 하는 것이 싫다. 백번 양보해서 떼창과 구호는 동시에 말하는 거니까 논외로 하고, 조의(弔意)를 표하는 말처럼 약속된 코드나 언어유희가 아니라 별 의미 없이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문장들이 싫다.


강유는 표를 그린다. 하고 싶은 일을 리스트에 차곡차곡 기록한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면 바로 쓰기보다 목차를 쓴다. 카탈로그의 사진을 빠짐없이 보던 가락으로 책소개책에 나오는 책의 제목들을 여러 번 훑어본다. 강유가 (읽지 않은, 읽고 싶은, 읽지 않고 기억만 할) 책을 머릿속에서 관리하는 방법은 표지사진을 통해 여러 번 스스로에게 노출하고, 중요한 책은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를 활용하고, 구입한 책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놓아두는 것이다.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책을 조사하는데 들이는 시간이 독서시간을 웃돈다. 다른 사람들이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썸네일 속에서 방황하듯 강유는 온라인 서점과 인스타그램 책표지 더미에서 서핑한다. 물론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화장품 가게와 로드샵에서 거의 모든 동시대 화장품과 동시대 패션 스타일을 스캔하던 시절에 앞서, 서점에서 거의 모든 수능 문제집을 스캔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느낌 그대로 문제집 대신 소설과 인문에세이를 스캔하고 있다. 책이 더 많아졌고, 대신 온라인 서점이 짱짱해졌다.


뭐, 오늘은 서버가 폭주*하는 것 같지만.



(계속)  

   



*2024년 노벨문학상 발표 2시간 후, 이 글의 초고를 작성하던 서점 계열사 어플의 접속이 끊겨서 임시저장된 700자를 복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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