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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07. 2024

덕질의 심연

집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는 작은 와인바에 도착한 강유는 늘 마시던 샤도네이로 시작했다. 하지만 주문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그녀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게 그러니까, 강유를 사로잡은 작가의 신작을 빨리 읽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강유는 그 작가가 너무 왕성하게 활동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른 작가들은 입덕하자마자 대표작을 읽어야지 하는 순간에 신간이 나와버리고, 겨우 신간을 손에 넣었다 싶으면 데뷔작 리커버가 나와버리고, 직전작과 대표작과 데뷔작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갈등으로 소비한다. 그게 그들의 잘못은 아닌데, 강유가 그들의 매력을 깨달은 타이밍이 어쩌면 그들의 전성기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겠지. 아무튼 강유가 사로잡혀있는 그 작가는 아주 신인은 아니지만 작품집이 아직 따끈한 한 권 밖에 없는 작가이며, 폭발적인 주목을 받기 보다는 꾸준히 자기만의 시그니처를 선보이는 작가다. 강유는 최근에 그 작가를 가까이서 보고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다. 글을 통해 작가를 만나는 동안에도 흠뻑 빠져있었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으며 가끔 책날개와 인터뷰 사진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적 친밀감이 쌓였다. 그리고 강유는 자신이 어떤 여성(예술가)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강유가 사랑했던 남성 예술가 혹은 일반인 남성의 경우 외모가 1순위는 아니었다. 물론 잘생김 더하기 아우라에 1차로 반하고 성격이나 대화의 결이 맞아서 쭉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외모에 별다른 스파크를 느끼지 못했어도 인정욕구나 다른 것들이 맞아떨어지면 한동안 몰입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래오래 행복했던 적은 없다. 동성 아이돌이나 동성 친구도 반하는 과정이나 그 지속성만 따져보면 조금은 그렇다.


여성 예술가 혹은 일반인 여성의 경우 강유 자신을 견제하지 않는 성정이어야만 관계가 가능하다. 그걸 티 내지 않으면 최소한의 친한 척은 할 수 있지만 당사자들은 느낀다. 이 관계가 가식적이라는 걸. 어린 강유는 그런 것을 숨기지 못해서 매번 패배했고 이제는 오해하면 그러라고* 한다. 오해하게 행동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오해하는 건 그들의 삐뚤어진 사고체계 때문인데 왜 해명(과 수치심)은 늘 강유의 몫인가. 물론 과도기의 강유는 자신의 영향력을 저평가해서 (말과 루머로 빚은) 칼을 맞을 뻔했다.


사랑하고 덕질하는 대상의 대부분이 여성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자신이 99% 이성애자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목적이 너무 다르다. 그러니까 욕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바라는 것이 젠더에 따라 달라진다. 반하고, 존경하고, 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거의 똑같다. 즉, 남녀불문하고 자기 젠더에 지나치게 순종하지 않는 자기만의 스타일과 에너지가 있고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충실하되 고지식하지 않으며 진정한 관심과 그걸 표현하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자신이 역발견되는 기쁨이 있다. 상대방이 남성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약간의 독점욕이나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싹트는데 여성이라면 정신적인 관계에만 몰입한다. 여성이라고 해도 당연히 직접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다른 존재(심지어 그녀의 남편이나 반려 동물을 포함한 모두)에 대한 질투도 느낀다. 하지만 그녀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 그냥 이 질투는 본능적인 것 같다. 엄마가 나보다 동생을 더 챙길 때 느끼는 것 같은 그런 것. (본인의 엄마가 아닐 경우 상대방의 ‘자식들’은 굳이 질투하지 않는다.)




​​우성은 난생처음 커서와 10분 넘게 눈싸움을 하다가 결국 노트북을 덮고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서 나왔다. 벌써 자정이 다 돼간다. 성북천을 향해 걷다가 시간이 늦었음을 깨닫고 전철역으로 방향을 튼다. 왠지 강유는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언니 모해?


강유는 손에 넣지 못한 신간을 생각하며 괜한 애를 태우다가 알람을 꺼놓은 카톡에 우연히 들어가서 마침 도착한 우성의 메시지를 바로 읽었다.


-와인 마셔.


우성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한 시간 정도는 강유도 괜찮을 것이다. 우성이 이동하는 시간을 포함하면 그보다는 더 지체되겠지만.


-나 가도 돼?


강유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으나 이미 머릿속의 그녀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우성이 여기까지 이동하는 30분 정도의 시간도 혼자 놀기에는 충분하다. 어차피 오늘은 사색하고 정리할 정신 상태가 아니다. 강유는 OK사인이 들어간 이모티콘을 보내고 카톡을 종료한다.


(계속)  




*김다슬, <이제는 오해하면 그대로 둔다>, 스튜디오오드리, 2021, 제목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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