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출근해야 하는 복선을 밤 11시쯤 들여보내고 강유는 비밀리에 2차로 혼술을 하려고 동네 와인바를 떠올렸다. 복선도 일단 집에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기에 말없이 버스에 올랐다. 복선은 이번주 내내 야근을 하느라 임시저장한 블로그 포스팅만 하고 디즈니플러스 앱은 켜지도 못했지만, 지난 주말까지 틈틈이 <위기의 주부들>을 N차 재주행하고 있었다.
이번 재주행은 그보다 더 많이 봤던 <화이트 칼라>나 <리벤지>를 볼 때처럼 성실하지 않은 모드로 했다. 켜두고 다른 일(심지어 독서!)을 하거나 잘 때가 많았고, 이미 아는 내용이지만 개그포인트나 언어유희를 그나마 지켜보는 건 집에서 밥 먹을 때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전체를 주행하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포인트가 있다. 예를 들어, 캐서린과 아담 부부가 각각 독립된 스릴러의 주연으로 등장하는 <바디 오브 프루프>와 <캐슬>을 모두 섭렵한 후 다시 옛 드라마로 돌아와 보니 둘이 한 화면에 잡히는 순간이 더욱 뭉클했다.
심지어 마지막에 본 장면에는 <크리미널 마인드> 최신 시즌에 깜짝 등장한 르넷과 이 구역의 문제맘인 앤 쉴링이 화장실에서 싸우는 장면을 보고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크리미널 마인드>에서는 데이비드 로시와 재결합한 뒤 공백기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는 크리스탈, <리벤지>에서는 악당 콘래드의 첫 부인이자 남주인공 중 한 명의 친모인 스티비 역할을 맡은 게일 오그레이디(Gail O’Grady)가 바로 앤 쉴링이었기 때문이다. 오그레이디가 세 작품에 모두 출연했고 나름 깜찍한 역할을 맡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의 주부들>의 주연인 르넷 스카보 역의 펠리시티 허프만(Felicity Huffman)이 스캔들로 점철된 필모를 뚫고 <크리미널 마인드>의 최근 시즌에 등장한 건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로시의 두 여자가 15년 전에 머리채 잡고 싸웠던 적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된…아니, 이미 싸운 두 여자가 알고 보니 데이비드의 주변인물이었다는 걸 새삼 확인한 것이다. 어쩌면 오그레이디가 하차하면서 허프만을 추천했거나 제작진이 오그레이디 필모에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맘 앤 쉴링이 큰 위기에 처하고 그 위기의 직접적인 계기이자 목격자로 르넷 스카보가 쉴링의 집에 있는 장면을 보다가 주말이 끝나서, 복선은 귀갓길을 조금 재촉하는 중이다.
<위기의 주부들>의 출연진은 <매드맨>에도 다수 등장한다. 게이였던 리가 <매드맨>의 여주인공인 페기 올슨의 썸남으로 등장한 이후로 복선은 그를 보면 설레게 됐다. 가브리엘과 재혼했다가 말 그대로 피를 봤던 페어뷰 시장 빅터 랭은 <매드맨>에서도 회사 임원으로 등장한다. <매드맨>의 돈 드레이퍼 부녀가 따로 또 같이 나온 괴랄한 미드, <매드맨>에서는 비중이 낮지만 페기 올슨 역의 엘리자베스 모스와 <핸드메이즈 테일>에도 함께 출연한 우리의 로리 길모어, 아니 알렉시스 브레델도 있다.
미드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길모어 걸스>의 말하기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복선이 참고했던 유튜버 출신 영어강사는 ‘더 빠르게’ 들으면 보통 속도가 더 잘 들린다고 했다. 복선은 <길모어 걸스>를 정주행하는데 7년 정도 걸렸다. 이 작품이야말로 계속 성실하지 않은 모드로 재주행하다가 다른 작품들을 질릴 만큼 보고 난 뒤에야 처음부터 스핀오프까지 집중해서 정주행할 수 있었다. 성실하지 않은 모드에서는 발음을 정확히 듣기보다 밥 친구, 백색소음이자 쉬는 시간에 귀에 바르는 배음, 수면제 등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속도는 빠를수록 좋다.
발음은 안 들려도 흥얼흥얼 하는 듯한 억양은 들려야 한다. 이런 리듬감도 영어 듣기에서는 중요하다. (한 가지 팁을 더하자면 잘 만든 미드는 운문적인 산문을 쓰는데도 도움이 된다. 미드뿐만 아니라 원서 읽기도. 그러니까 좋은 영어는 각자의 모국어를 강화한다.) 발음의 경우 앵커나 성우의 정확함이 기준이 되면 보통사람과 대화하기가 어렵다.
넷플릭스는 2배속까지만 지원하고 디즈니플러스는 아예 배속 기능을 지원하지 않는다. 엄마 길모어의 수다를 2배속으로 듣다 보면 세상 모든 영어가 느리게 들리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로리를 사립학교에 무사히 정착시킨 후에야 전문학사를 취득한 로렐라이는 아메리칸 아재 개그의 달인이자, <길모어 걸스>의 난이도를 높인 일등공신이다. 한편 예일과 하버드에 동시합격한 수재인 로리는 <가십걸>의 블레어 월도프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복선의 질투를 많이 불러냈다.
저런 엄마와 저런 할머니라니, 저런저런.
복선은 자신이 원어민이었다면 로렐라이만큼은 아닐지라도 로리보다는 빨리 말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원어민이 아닌 사람이 원어민에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은 2세를 원어민으로 키우는 것뿐이다. 즉, 본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원어민이 될 수 없다.
과도기에 이민 2세나 선천적(?) 바이링구얼을 은근히 질투하기도 했지만 복선이 비영어권 영어능력자 세계에서 드디어 중상위권에 진입하는 동안 디아스포라 문학이 폭발적으로 쏟아진 바, 그들은 오히려 어느 세계에서도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운 존재임이 알려졌다. 갖기 전에는 영어구사능력이 일종의 계급을 상징하는 것 같았으나, 갖고 나면 그 계급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훨씬 또렷하게 보인다. 복선이 아예 서민으로만 둘러싸인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몰라도 됐을 것들처럼, 막상 들어가 보니 내 처지만 더 우습게 느껴지는 상황도 있었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것들.
영어문화권에서 동아시아 여성을 인식하는 방식. 못 들은 척했던 <소셜 네트워크>의 동아시아(한국…이었나?) 여성 대상화하는 대사들(혼자 봐서 다행이다.)이라던지 너무도 눈에 밟히는 한국계 배우들의 짠한 활약 또는 노골적인 굴욕이라던지. <블랙리스트>에서 (조금 늦게) 한국계 여성 중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FBI 핵심인물로 등장한 에이전트 박은 결국 하차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크리미널 마인드>에서는 다니엘 헤니가 하차했고, 산드라 오의 <킬링 이브>는 조기종영을 한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