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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17. 2024

버린 꿈과 버릴 꿈

강유는 타자의 시선으로 복선을 바라볼 때 그녀가 스스로의 스펙을 이고 지고 사느라 피곤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강유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명문대 출신인 복선은 그녀의 동문들이 으레 그러하듯 자신의 학교에 대한 자랑이나 소개를 회피하는 편이다. 한편 인지도 높은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수석입학했던 강유도 굳이 그 학교의, 굳이 수석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생각한다면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고(굳이 따지자면 아티스트도 아닌데 실력이랄 것도 없고) 그냥 생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랜덤 타인도 아닌 지인의 매장 관리자로서 스펙은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나도 이런데 복선은 오죽할까, 강유는 생각했다. 아직 세속적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직 알바생인데 무슨 말 못 하는 병에 걸려서 자랑도 속 시원하게 못하고 겨우 영어라는 대어를 낚았다고 해도 당장은 별 쓸모가 없는 복선의 처지에 대해.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안정적인 복선의 환경에 대해.




​우성은 예술가적 관점에서 허세나 과시는 종종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배척하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돈 자랑, 스펙 자랑, 인맥 자랑이다. 그리고 예쁜 척. 예쁜 척이 아니라 예쁜 거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당사자가 담담해야 한다. 가끔 자기가 예쁜 걸 깨닫지 못하는 답답이들도 있다. 한편 자기가 예쁜 것이 마치 스펙이나 능력인 양 과시하는 부류도 있다. 우성은 일단 예쁨이, 그것도 어떤 성별화된 예쁨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취급하는 태도가 불쾌하다.


아직은 확신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대신 변명해 주며 복선을 이해하려고 한 적이 있다. 우성이 보기에도 복선은 이미 전성기에 진입했는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채 늙고 있으니 초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와 같은 캐릭터는 오래 만날 수 없겠다.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했다. 강유 언니는 왜 복선을 데리고 다닐까. 아니, 복선이 따라다니는 걸까. 하긴 강유 언니는 그 단계를 지났으니까, 복선이 그저 애처로울 것이고 복선은 그런 강유 언니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보겠지.




강유도 모든 것을 좋게만 해석하지 않는다. 얼굴이나 필모를 공개하면 친숙한데 이름은 아무도 모르는 무명배우인 부모, 어중간한 아티스트 집안의 아비투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일류대를 포기하고 결국 이렇다 할 경력도 없이 마흔을 바라보는 자신. 집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복선도 마찬가지겠지만 불특정 다수의 인정에 쉽게 만족하는 복선이 단순해서 부러우면서도 짜증 났다. 아니, 복선아. 너는 더 잘하고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잖아. 뭐, 그걸로 만족한다면 행복하겠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무슨 죄일까. 어린양을 팽개치지 못한 죄? 복선을 우성에게 소개해준 날이 떠올랐다. 둘의 팽팽한 긴장감을 관찰하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든 옆 테이블의 냅킨. 우성은 합석하자는 메모를 보자마자 구겨버렸고, 강유는 그들의 어린 나이와 주책맞은 행동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는데 복선은 혼자 즐기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헌팅이 들어왔다고 생각했겠지. 우성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지는 건 모르고. 강유는 ‘애들이 너무 어려.’라고 정리하며 복선에게 어깨동무를 해서 차단했지만 복선이 한동안 들떠있는 것도, 우성이 그런 복선에게 내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자신도 그런 날을 겪었을 거라는 어렴풋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런 상황 자체가 싫음에도 강유는 복선의 반응에서 과거의 자신을 읽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복선을 따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따돌렸다가 걸려서 난처해지느니 그냥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우성은 그게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우성의 숙제 같은 것이다. 우성이 뭔데, 자기가 어떻게 복선을 도려내고 강유만 취하겠는가.




복선은 더 이상 배우를 꿈꾸지 않았다. 영어 크리에이터로의 야망도 아직까지는 성실한 기록자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얼굴 나오고, 발음 들리게 영상을 찍으려면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어학연수를 더 열심히 해야 하고 이미 잘하는 것보다 원래 못 하는 것에 더 많이 신경 써야 하는데 그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우성은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마음을 지키고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한다면 계속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올인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남모를 질투와 분노를 느끼지만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저 사람도 본업이 따로 있어서 올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아닌) 것 아닐까. 영화 티켓과 소정의 용돈을 주는 파트타이머를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양껏 하고 이름을 키워나가는 것 이상의 또 무언가를 하게 될 기회가 있겠지. 크리에이터 세계에서 다양한 응원과 기대를 만나는 우성은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아직 덜 알려져서 속상한 마음속에서 부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매일매일 쌓여가는 기록이 어느 날 임계점을 넘길 거라는 사실을 믿는다.


이미 그래왔기 때문에.




강유는 사장 언니를 통해서 또 한 번 대리창업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계속할 수 있을지는 해 봐야 아는 거니까. 일단 지칠 때까지 하게 될 것이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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