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모과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삼일절에 읽은 황모과 작가의 <밤의 얼굴들>과 연결되는 작품이라 <밤의 얼굴들>의 리뷰를 쓰기 전에 미리 쟁여둔 장편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신간 <그린 레터>의 리뷰를 쓰고 나서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이 책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의 배경이 되는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에 시작되었고, 저자는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3년 광복절에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출간했다. 연도는 알고 있었으나 계절이 희미해져갈 무렵 다시 이 책을 펼처든 날도 9월이었다.
이번에도 무연지령으로 시작하지만 조금 다르다. 저자의 분야인 SF와 책의 분량인 장편의 장점(!)을 살려 반복되는 역사의 재구성을 보여준다. 퍼즐이 맞춰지기 전에는 뭔가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불통 상황에 먹먹하지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역사소설과 과학소설을 좋아하면서도 (팩트 저장력이 부족하여)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읽을 정도는 아니었던만큼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빠지는 어떤 순간이 고통스럽게 행복하다. 황모과 작가와 한강 작가, 박민정 작가(완독순)의 역사물을 정주행하기로 결심한 건 그런 이야기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알게 되는 고통을 감수할만큼, 그 앎을 표현해내는 능력도 함께 알게 되는 행복.
워낙 멸시받는 처지였기에 앞으로는 좋아질 일만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버티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참혹함이 눈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57p
남자는 발길질을 당하면서도 웃으며 애원했다. 자신이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듯, 울면서도 웃고 있다는 듯. 억울함을 억누르며 억울하지 않다고 가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145p
이들은 해외에서 파르티잔을 잔혹하게 섬멸한 경험을 가진 경력자들이었다. -188p
그려서 암것도 안 하면 그땐 믿어준대냐? -209p
그 대신 다른 말을 듣고 싶었다. 같이 싸웠다고, 그때 곁에 있었다고, 같이 울었고 함께 버텼다고, 모두 저항했다고. -226p
공범자 의식 속에서 서로의 죄를 숨기며 위로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243p
내 시계가 앞으로 가고 있다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순 없지. -260p
과학소설의 요소를 시점 전환으로 치환하면 작년 이맘때 읽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겹쳐보인다. 대학살과 루머, 진상 재규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혐오를 확산하고 혐오에 편승하여 사적 욕망을 해소하는-그런데 평범해서 더 충격적인-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연대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왜곡된 역사를 재구성할때조차 이분법적 관점은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는 사실까지.
특히 일본 배경의 작품이 낯설다면 사요와 미야와키가 등장하는 3부까지 빠르게 도달하기를 바란다. 어느 곳이든 사람 사는 곳의 비슷함에 소름끼치게 슬퍼지는 한편 이분법적 사고와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빌런의 심리를 관전하는 고통스럽지만 통쾌한(?) 재미는 덤이다. 이런 부분이 덜 어렵고 더 매력적인 문학작품의 힘이 아닐까.
<밤의 얼굴들> 리뷰 다시보기
https://brunch.co.kr/@swover/401
위 링크가 포함된 브런치북에 저자의 신작 <그린 레터> 리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