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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Nov 18. 2024

39화 그 프로젝트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2)

“그걸 수진이 너한테 줬어?”

“응.”




별다른 설명 없이 치호가 대답했다.

나는 수진에게 시계를 주었다. 수진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떠올린 것도 시계였다. 나 때문에 그녀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아서. 나아가지 않는 시계 따위를 선물로 준걸 후회했다.


치호가 건네준 시계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멈춰있던 시간조차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3시 28분. 어느 순간 있고 있던 시계를 다시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줄게.”

“아냐. 이미 준거고, 그걸 네가 받았다면 이유가 있겠지.”


치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대꾸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이 의외였다.


“혹시 피곤해?”

“아니.”

“근데 왜이렇게 텐션이 낮을까.”

“밤이라서..”

밤? 그러고보니 김지훈이 그랬지. 맥아리가 없다고. 해가 지면 텐션이 떨어지는 걸까.

“밤에 약하구나.”

“....”

“자?”

“아니.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바로 앞에 있는데 딴 생각을 한건지 그가 다시 되물었다.


“밤에 약한가보다고.”

“....응.”

“다음엔 너무 늦지 않게 연락할게. 오늘은 그 말 전해주러 온거야. 네가 해킹? 같은거 잘하는 거 알겠는데 그쪽에서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으니 너무 캐지말라고.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괜히 피곤한 애 붙잡고 있는게 미안해져 나는 후다닥 겉옷을 챙겼다. 서둘러 구두에 발을 우겨넣었다. 내가 하는 양을 느린 나무늘보처럼 쳐다보던 치호가 말했다.


“하나 더 필요한 거 있어.”

“뭔데?”

“회사 인사리스트 좀 가져다 줘.”

“알겠어.”


왜, 라고 묻지 않는 당신이 이상해. 말하지 않아도 눈으로 표정으로 얼굴로 말하는 치호가 왠지 웃겼다. 역시 아이는 아이구나. 아직 생각하는게 훤히 보인다.


그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수진의 시계를 보고 나서 나는 의심을 거뒀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수진을 위한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한테 주는거예요.’

‘..과분한 의미네요.’

‘수진씨도 신뢰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거 줘도 돼요.’     


한결 가분한 발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하늘을 보니 달이 무척 밝았다.     





인간이 필요하다는 말. 그 말을 누가했더라.


"인간이요?"


뿔테안경 너머로 최훈은 눈을 반짝였다. 엄지와 중지를 맞물려 딱, 하는 소리를 냈다. 내 반문이 맘에 드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그게 더 의아했다.


"어. 솔직히 필요하잖아. 우리들 하는 일엔."

"그야.."


분명 약학과 관련된 내용은 결국엔 사람에게 적용되기 마련이었고, 인체적용시험이라는 최종단계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사람 아닌 인간. 인체 아닌 인간. 마치 종(種)을 나타내는 말을, 물건처럼 던진 것이다. 어색함이 감돌던 입을 쩝쩝 하고 있자 최훈이 마저 내 말을 받아쳤다.


"잘하면 큰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과장님, 아직 제대로 된 효능도 모르고,"

"그래서 인간이 필요한 거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된 효능과 효과. 부작용까지 포함해서 정량의 정의. 그 후에야 할 수 있는 인체적용시험. 뒤집어서 말하는 그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지만 우리 앞엔, 적어도 모든 과학자들 앞엔 법이란게 있지 않나.


보기 드물게 잔뜩 상기된 최훈의 표정은 오랜만이었다. 이윽고 그는 수진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수진도 이 아리쏭한 수수께끼에 의아함을 표했지만 최훈이 한발 더 빨랐다. 필요? 불필요? 그렇게 물어보시면 필요겠지만요. 그치?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수진이 마지못해 대답하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준비는 되어있는 거예요?"

"그럼."


그는 다짐하듯 되물었다.


"준비되어 있으면, 한다는 거지?" 최훈이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사실 최훈에게 나와 수진의 동의는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물어봐준 건 감사하다고 해야될 부분일런지. 회사에서 우리 부서에 예산을 주지 않을 거라고, 박박 우긴 나만 뻘쭘하게도 최훈의 제안서는 통과되었다. 곧이어 예산이 편성됐고, 결과진행사항보고 업무도 추가되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내심 걱정하면서도 착착 진행되는 상황이 싫지 않았다. 자꾸만 꿈을 크게 가지라면서, 여기서 노벨화학상 하나 나와도 되는거 아니나면서 매번 핀잔을 듣고도 꿋꿋한 최훈의 말이 듣다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고. 갑자기 좋아지는 환경에 충분한 연구결과를 기대한다는 상부의 의견에 나 또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처음에 인간이라는 단어선택에 꼬리표를 달고 따라왔던 미묘한 느낌과 달리 최훈은 매우 예의바르게 사람들을 대했다. 보통 친절한 설명에 덧붙여 한 사람 한 사람과 농담 따먹기 정도는 할 수 있을만한 사이가 되곤 했는데, 한결 같이 사람들은 예의대우를 받는게 어색한 공통점을 내비쳤다. 그들은 최훈을 좋아하고 인상좋은 수진도 좋아했지만 무뚝뚝하게 차가운 종이와 시험약물만 건네는게 전부인 형식적인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는 제법 일다운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바빠졌고, 초반엔 매일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일당으로 채워 넣은 봉투를 받아들며 하나같이 그들은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했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가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보람도 있었다.


그즈음 내겐 일종의 습관 비슷한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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