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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Nov 22. 2024

41화 열아홉 아이들과 주말에 놉니다

윤리위원회와 경찰이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 배후에 김도명이 있었고, 중심에 최훈이 있었다.




우리는 최훈에게 가담한 동범자나 다름없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에서 조사를 받았다. 제대로 대화를 나눠볼 시간조차 없었다. 나와 그녀는 일종의 동류 취급을 당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녀와 나는 조금 달랐다.


바람결에 나부끼듯 감정의 기복도, 심신도 불안정한 나와 달리 그녀는 꽤나 담담했다.

처음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나는 일단 믿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반쯤 그녀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태도만은 조심스러웠다. 뭔가를 가늠하고 숙고하는 걸로 보였다. 


긴 침묵 끝에 알겠다고, 이제 자신이 뭘 해야 되냐고 묻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심각하게 굳은 얼굴만 아니었다면 철썩 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 후로 웬만해선 그녀는 큰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프라이팬의 기름처럼 여기저기 튀는 내 옆에 있어서 그것이 더욱 도드라져보였다. 나는 이 심지 굳은 사람에게 안정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나와 같은 처지인 그녀에게 하소연하거나 불만을 토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게 지속되니 어느덧 내 눈에 그녀는..초연한 듯 보이기까지 했다.


검은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까맣게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고, 형사들이 묻는 말에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최훈'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면 적응되지 않는 듯 반응이 늦어지곤 했지만 횡설수설하지는 않았다.

내 앞의 그녀는 이런 단어가 어울릴 것 같지 않게도..당당해보였다.


곧게 선 그 등과 어깨와,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다시 앞을 바라보는 시선.

나는 몰랐다. 그것이 부서지기 직전의 팽팽함이었다는 것을. 그녀야말로 소리 없는 고요 속에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주말에 일찍 눈이 떠졌다. 윤주와 영상통화를 하고 나니 8시였다. 원래라면 11시쯤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작은 원룸에서도 먼지는 꾸준히 쌓였고 지난 퇴사 이후 주변을 방치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할 일이 꽤 있었다. 


하지만 어제도 잠이 오지 않아 이미 청소를 끝내고 잠들었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TV를 틀었다. 뉴스에선 요즘 청소년들의 운동량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운동량은 나도 부족했다. 

그래서 오지랖을 부려보기로 했다.      


남산 등산로 초입길에서 만난 치호는 저번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피곤하던건 괜찮아졌어?”

“나 십대야.”


싸가지 없는 말투가 여전한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남산을 오르자고? 갑자기 불러내서?”

“갑자기는 아니지. 내가 편한 옷 입고 오라고 했잖아.”


치호는 명품 로고가 떡하니 박힌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있는집 자제란걸 여기서도 티내내. 나는 티나지 않게 그가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을 훔쳐봤다.


“안 가?”

“잠깐.. 아직 다 안왔,”


8시 50분까지 오라고 했더니만 벌써 9시였다. 말하는 도중 저멀리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으아, 형님! 제가 늦으려고 한게 아니라..으아악!!”


달려와서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김지훈은 제 옆에 서 있던-나와 마주보고 서 있었던-치호를 보고 귀신을 본 것 마냥 소리를 질렀다. 치호는 귀를 막으며 경멸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잘한 거 맞겠지?


“얘가 왜 여기있어요?”

“그건 내가 할 소린 것 같은데 지훈아.”

“야이 씨X아. 징그럽게 이름 부르지 마.”

“너처럼 저급하게 욕으로 온 세상사람을 부르는 것보단 낫다고 봐.”

“또 또 지랄하네.”

“어허. 얘들아 욕은 하지말고..”

“욕은 김지훈만 했는데?”

“.....”


두 사람이 만나서 하하호호 내 말을 잘 듣고 풀어질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초반부터 이렇게 흉흉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지금이라도 둘 중 한명을 집에 보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 가도 되지?”


그때 치호가 말했다. 


“어엇, 어디가려고.”

“지훈이랑 나랑 잘 풀어보라고 머리 쓴 것 같은데, 얘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닐뿐더러 그렇게 될 수도 없어. 에너지 소모만 커지니까 가려고.”

“어휴 너는 태어나면서도 ‘쾌적함이 부족해서 있는동안 힘들었네요. 앞으로 잘 좀 하시게요’ 이랬지? 어떻게 입만 열면 저렇게 싸가지가 없냐.”


드물게 지훈의 말꼬리가 터졌다. 쟤가 저렇게 말을 잘하는걸 처음 본 것 같았다. 

사실 그 말에 나도 뭐라고 해줘야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너무 그럴듯한 말에 웃음이 터진 것이다.


“크큭,”


이때다 싶게 지훈이 내 웃음을 잡고 늘어졌다.


“형님도 인정하시죠? 야 너는 좀 자기주관화가 되어야 해.”

“자기객관화겠지.”


한 마디도 안지는 치호였다.


“푸흡, 풉. 으하하하하”


그 대화를 보고 있던 내가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빵 터져서 큰소리로 웃고 있으니 아이들이 벙쪄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결국 나를 보고 있던 치호와 지훈도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지들은 심각한데 보고 있노라니 그냥 웃음만 나왔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치호도 지훈 옆에 있으니 그냥 그 나이 애들로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한다고 끊임없이 어필하지만 되려 그래서 서로를 더 신경쓰는 것 같았다. 


혹시 모르지.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지도.

한바탕 웃고나서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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