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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Nov 25. 2024

42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어요

혹시 모르지.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지도.

한바탕 웃고나서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산 공원에서 시작해서 서울타워까지 올라가는 코스로 2시간 정도를 걸었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허벅지와 종아리는 뻐근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뭐만 하면 투닥거리던 치호와 지훈도 30분 정도가 지나니 그냥 묵묵히 걸어오기만 했다. 


치호는 종종 생각에 잠긴 듯 멈춰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가 보는 시선은 한참 멀었다. 어디를 보는지 가늠이 안되는 먼 눈빛이었다. 지훈도 그런 치호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서울타워에서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훈은 치호와 찍는 게 싫은 듯 했고, 치호는 그냥 이 멤버로 사진을 찍는다는게 싫다는 뉘앙스였지만 내가 기어코 찍자고 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찍어준 사진에서 나랑 지훈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해봤어요?”


어느새 다시 아저씨 호칭으로 돌아간 지훈이 말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건 ‘사랑의 자물쇠’였다. 


“음.. 옛날에?”

“오오.”


혜경과 연애하던 시절에 와서 자물쇠를 달았다. 이런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는 해도 연애초반에는 무릇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미 회수해갔겠지?”


벌써 몇 년도 더 된 일이다.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자물쇠 근처로 가서 쓰여진 이름을 확인했다.

민주♡민혁, SE♡TI, SY♡YH, 지현♡성준, SA♡KW... 한글도 있고 이니셜도 많았다. 

적힌 글씨를 보다가 잠시 멈춰섰다.


‘수진이랑 우진이 왔다가요♡’


다른 자물쇠와 별다를 것 없는 멘트. 글씨. 이미 녹슬기 시작한 분홍색 자물쇠.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요?”


내 옆으로 지훈이 쑥 들어왔다. 내 시선을 쭉 따라간 그의 시선도 분홍색 자물쇠에 닿았다.


“아! 알았다.”

 지훈이 씩 웃더니 말했다.


“아저씨 첫사랑 이름이 수진이었나보다. 푸하하”

“....”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지훈이 웃음을 멈추고 눈알만 굴렸다.     

내려와서는 돈까스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여기 돈까스집 엄청 오래기다리고 맛도 그냥 그래요. 제가 아는 찐 로컬맛집 있는데 그리로 모시겠슴다.”


아까의 싸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지훈은 찐로컬맛집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이치호한테 알려주긴 너무 아까운데..”


“지훈아 네가 다니는 맛집이면 내 수준에 안 맞아.”
 “아우 저걸 진짜 죽여..?”


찐 로컬맛집이라고 하는 순대국밥집에서 특순대국밥 세 그릇을 시켰다.


“근데 이건 돈까스랑 결 자체가 다르지 않냐?”

“에잇. 드셔보심 알아요!”


말의 요지를 이해못한 것 같았지만 지훈의 상기된 표정에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순대국밥은 정말로 맛있었다. 마지막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아까 자물쇠요. 제가 혹시 뭐 잘못했어요?”

“어?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 이름이어가지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괜히 미안해졌다.


“저런거 다 쓸모없다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 저도 해보고 싶긴 해요.”

“그래그래. 너도 대학가서 여자친구 사귀면 해봐.”

“저 여친있는데요?”


의외의 말이 나왔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대꾸했다. 


“..그래. 미안하다.”

“괜찮아요. 저번주에 헤어졌어요.”

“그러냐. 그럼 다음 여자친구랑 해 봐..?”


우리 둘이 말하는 걸 보고 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근데 그거 어차피 회수해가니까..남지를 않잖아요?”


지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그거 있는데. 땅에 파묻고 담아두는거요. 차라리 그게 낫지 않나?”

“타임캡슐?”


치호가 말했고,


“어 맞아!”


지훈이 명쾌하게 외치며 웃었다. 치호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로 두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뻘쭘한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서 그걸 보고 있는 내게는 그저 훈훈한 광경이었다.


“타임캡슐에 담아두고 몇 년 뒤에 열어보면 되잖아요. 아 근데 헤어졌으면 X되는건가?”

“허허허”

“헤어지지만 않으면 되게 좋을 것 같은데.”


지훈은 타임캡슐 안에 뭘 담으면 좋을지 되는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타임캡슐이라.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땅에 파묻어놓고 나중에 꺼내본다. 꺼내봤을 때 의미있는 물건이--.


'산책 하고 와.‘


9년 전 점심시간엔 항상 산책을 했다. 최훈은 일의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꼭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부류였다. 


생각이 풀리지 않을 때면 본인이 산책을 가는게 아니라 우리를 내보냈다. 

산책하는 동안 나누었던 시덥잖은 얘기들. 계절마다 습기를 머금는게 달랐던 바람. 그리고 어느 봄, 그녀가 했던 이야기.


’타임캡슐 만들어 보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 바닥에 부딪히며 쿵 소리가 났다. 치호와 지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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