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창준 앞에 나타난 치호는, 9년 전 인연이 있던 아이였다.
그는 창준에게 동료 '수진'이 자살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창준이 일했던 도명제약이 지금의 DM클럽이 되었음을 설명한다.
"도명제약 이사장 김도명이라고."
그 순간 잘근 잘근 씹던 뭔가를 퉤, 내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씹던 것도 없고, 내뱉을 것도 없었다. 목지게 올라오는 무형의 덩어리가 식도를 막는 순간 드는 생각은 '참 바보 같다' 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주 전, 나는 회사에서 한 사업을 맡게 되었다. 전반적 인테리어 및 시행사를 겸해 DM클럽이라는 프랜차이즈 클럽 10호점의 개점 인테리어 계획서였다. 왜 이게 내 손에 오게 된 것인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일단 우리 회사가 세 번 째 회사였다. 까다로움. 그 숫자 하나만을 가지고도 유추할 수 있었다. 계약파기는 번번히 업체 쪽에서 했다고 들었다. 위약금을 물어가면서도 고개를 젓는 회사. 아마 사람 문제겠지. 일이 거지같아서 계약이 옮겨가는 경우는 내가 알기론 거의 없었다. 이거 또 골치 아파지겠고만. 그때까지 DM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던 문자 나열에 불과 했다.
대표이사 이름을 보지 않았을까? 아니 확인했겠지. 실제 나는 치호가 짚어주기 전까지 그 김도명이 이 김도명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보통 자기가 나온 초등학교는 알아도 교장 이름만 듣고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나. 어쨌든 그 이름이 가져온 여파는 충분히 강했다. 나는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는 커피 잔을 들이키고 대충 넘겨야겠다 싶어 슬렁슬렁 하던 일에 빨대를 딱 꽂은 고등학생을 쳐다보았다.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누구한테? 김도명한테?"
나는 헛웃음을 쳤다.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입 밖으로 질질 새는 웃음은 그것 외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치호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가 나한테 말했다.
"한 번에 수락할거라곤 생각 안했어."
그의 잔에 담긴 커피는 반이 넘게 남아있었다.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잘그락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일주일 뒤에 다시 올게. 그때 얘기해."
벙쩌있는 내가 잡기도 전에 그는 몸을 일으켰다. 나가면서 커피가 맛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카페 주인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랑, 지나치게 경쾌한 방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주문이 풀린 듯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이치호는 없었다. 나와 그를 번갈아 보던 카페 주인의 시선만이 잔여물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일개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일 뿐이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 치호가 말하는 ‘도움’이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생각을 하든, 그 냉랭한 얼굴이 ‘너한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라는 말을 떡 붙이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귀결되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차가운 원룸에는 사람 흔적이 전무했다. 한때는 나도 단란한 가정을 꿈꿨다. 잘 살아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내게 드리운 그림자는 나조차도 인지못한채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윤주가 놀이공원 가고 싶대. 10시까지 데리러 와.‘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아내 혜경에서 온 연락에 잠시 고민하다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항상 그런식이지’
원망섞인 눈빛. 멋대로 기대했다가 나를 떠나가는 사람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사람을 어지간히도 부려먹었다. 몸은 솜을 머금은 듯 무거웠지만 그 점만는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럴 여유조차 없으니까.
나는 차디찬 이불 속 침대에 몸을 뉘이고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매일 꿈을 꾸었다. 이치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잠을 자면 꿈을 꾸기도 한다는게 사람이란 걸 완전히 잊고 살았었다.
꿈 속에서 나는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9년 전의 나는 젊고 활기가 넘쳤다. 꿈 속의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저렇게 열심히 살아봤자 다 쓸모없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싫어서 기분이 나빴다.
‘오! 해냈다!’
꿈 속의 나는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뭐를?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얼굴을 돌렸고, 나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해냈잖아요! 선배!’
“헉.......!”
매번 그 부분에서 깨어난다는게, 사실은 악몽과도 비슷했다.
꿈 속의 내가 부르던 사람. ‘선배’는 둘 중 누구였을까.
회사 밖을 나온 시간이 열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설마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페로 갔지만 카페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대신 시커먼 뭔가가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보는 순간 그게 이치호란 걸 알았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대답을 준비하지 않았으면서 나 또한 그가 나타나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내 시야에 정확히 잡히는 순간 그건 모두 잊고 소리치고 말았다.
"야 너..! 이게뭐야?!“
달빛아래 어슴푸레 드러난 치호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눈가와 입 주변에 피딱지와 볼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멍은 파란 와중에도 피가 뭉쳐 빨간 점 같은 게 보이는데다 이제 막 활개 치듯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보기만 해도 그곳에 뜨끈뜨끈한 열이 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건들면 아플 거란 생각은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걸음에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움찔하는 그의 솜털까지 내 손가락에 와 닿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대신 뭔가를 가늠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눈이 내가 누군지 알아보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창준..?”
“어, 왜.”
내가 대답하자 그는 이내 잠잠한 반응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도리어 내가 아픈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누가 그랬어??"
"..그게 중요해?"
"뭐어?"
그의 담백한 말투에 황당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으아아.."
그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곱상한 얼굴을 망가뜨리고 온 거는 안쓰러웠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은 샘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
“별로 안 아파.”
입은 살아서 안아프다는 소리나 한다.
"패싸움도 아닐 거 아냐. 어디 할 짓이 없어서...내 이 놈들을 그냥..!"
멀쩡히 서있는 걸 보니 얼굴만 집중적으로 가격한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또 분통이 터졌다. 흥분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웃어?
방금 전보다 더 황당한 표정일 것이 분명한 내가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소리 내던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잠시 주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내 동태를 살피던 그가 말했다.
"아니 너무 친절하셔서..내가 다 놀랐네."
치호의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비아냥도 수줍음도 아닌 말은 담백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냥 말 뜻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 그에게 말했다.
"..일단 상황설명 좀 해봐. 그 꼴로 여기 왔으면 그럴 의사는 있겠지?"
의외로 그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병원 좀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