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수진은 독특한 동료였어요

by 은자루

지난 이야기


복수를 결심? 했다기 보단 이치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 창준.


“내가 뭘 하면 되냐고.”

어쩐지 소리를 듣는 게 아닌, 말하는 내 입술 끝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 전 주머니에서 작은 커널형 이어폰을 꺼냈다. 귀에 집어넣고 거울을 바라봤다. 얼굴을 돌려가며 봤지만 자세히 보지 않은 한 뭔가를 꼈다고 생각하긴 어려울 정도로 작았다. 생긴 건 영락없이 이어폰같아보였는데 이것을 받으며 물었을 때, 이어폰은 아니라고 했다.


“도청기”

“도청한다고?”

“도청만 하겠어. 뇌파를 이용해 생각까지 읽을 수 있어.”


치호가 제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웃지도 않는 통에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건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춤하고 있자, 이치호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너 농담도 치는 캐릭터였어?”

“글쎄.”


새벽 3시. 병원을 나온 그에게 ‘뭘 하면 되냐고’물었을 때,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한 오피스텔이었다.


“들어와.”


방 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운 컴퓨터 3대와 한쪽 구석에 있는 칠판형 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게임하려고 해놓은건.. 아니겠지?

그는 물 한 잔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구석에 있는 작은 쇼파에 앉았다.


“여기 사는 거야?”

“아니.”


의례적인 물음이었는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여긴 작업실이야.”

“작업? 무슨 작업..”


그렇게 말하다가 칠판형 보드에 붙어있는, DM이라는 키워드를 필두로 무수히 가지치기 하여 연결되어있는 마인드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복수’라느니 허무맹랑한 소리만 늘어놓는 건방진 놈.”

“...”

“이라고 생각했었지?”


치호가 물 한모금을 마시고 말했다. 허점을 찔린 나는 잠시 주춤했다.


“아니 나도 딱히 무시하진 않았거든..”


그래도 이 정도로 본격적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간단하게만 설명할게. 9년 전 논란의 중심에 있던 (구)도명제약은 알다시피 파산했지. 그리고 몇 년 뒤, 도명제약 이사장인 김도명을 대표로 법인 하나가 설립했어. 그게 지금의 ㈜DM. 산하계열의 회사는 없지만 자금원이 튼튼하고, 영업이익도 계속해서 상승세. 아마도 도명제약에서 벌어들인 자금이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야. DM은 와인바, 클럽, DJ사업기반으로 돌아가고 있어. 최근엔 엔터에도 손을 뻗친 것 같아. 요즘 한창 유행하는 아이돌 양성 프로그램. 거기의 중소기업 소속사 중 하나 미래엔터가 DM이 후원하는 곳이야. 그리고 그런식으로 하나 둘씩 손을 벌리면서 나온 기업중에 제약회사가 하나 있어.

거기까지 말하고 치호는 잠시 멈췄다. 나 역시 제약회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약회사라고?”


“응. 사실 회사라고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작은 소규모야. 심지어 회사도 아니야. 아주 작은 중소기업의 작은 부서거든. 근데 회사도 아닌 그 부서로 후원을 아끼지 않더라고. 아무리 봐도 DM의 주력사업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보이지 않아? 게다가 그 후원을 기반으로 하는 1인 기업이 하나 있어. 굳이 말하자면 후원하는 부분이 주요사업이고, 이쪽은 영업기반. 1인기업 대표로 들어가있는게..김도명의 장남이거든.”

치호는 김도명 밑에 화살표를 그리더니 이름을 하나 썼다. 김도욱.


“장남의 회사여서 그런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치호는 잠시 침묵했다. 그와 나 사이에 감도는 침묵이 물먹은 솜이불처럼 무거웠다.

그가 가장 큰 모니터 앞으로 가서 앉더니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서 작은 케이스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그게 바로 이어폰 모양을 한 도청기.. 가 아니라 녹음기였다. - 물론 나중에 물어보니 도청기능도 있다고 했다 -


“그 부서는 명목상 인테리어 회사에 숨겨놓고 마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


인테리어 회사. 그 말에 내가 치호를 바라봤다. 그는 이제 알았냐는 투로 내게 말했다.


“그 부서가 당신 회사에 있어.”


치호는 사내 조직도를 화면에 띄웠다. 내가 익히 아는 우리 회사의 조직도였다. 나는 그 부서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거긴 망분리가 되어있어서 아예 접근이 안되더라고. 그 부서 안에 있는 자료 좀,”


치호가 거기까지 말하고 싱긋 웃었다.


“훔쳐다 줘.”




**

그녀와 나는 같은 회사 동료였다.

군대 제대 후 쓸데없는 헛바람이 들어 허송세월을 보내느라 졸업이 늦어진 나는 그녀의 두 기수 아래로, 나이는 내가 더 많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 하늘 같은 선배님이었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착실하게 학교를 다니고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매끄럽게 입사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것도 어찌 보면 그냥 들었던 이야기여서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녀에 대한 뜬구름 잡는 식의 두루뭉술한 인상이 내게 유달리 멋져보였던 걸 보면 아마 입사 당시까지도 나는 철이 좀 덜 들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과 이름정도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은 나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사이. 이런것에 ‘사이’라는 관계를 정의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오다가다 의례적인 인사만 몇 번 나누고, 필요한 자료를 메일상으로 아주 가끔 건네받던 그녀와 같은 부서로 발령이 났을 때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그럴만한 이유도 없을 뿐더러 명확하지 않은 불편함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는데 스스로도 그 의도와 목적이 보이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것이 몇 기수 차이나지 않는 그녀와 나의 평판이라던가,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비교당할만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라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인사발령이 난 그 날 나는 몇몇 전화를 받았고, 내가 회사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연락할만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놀라워했으며, 그들의 말투에 알게 모를 질투와 네가 대체 왜? 라는 감추지 못할 불신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불이 붙나 싶던 관심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고생 한번 하고 오는 거지. 내팽개치듯 던져놓은 누군가의 마지막 말이 내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겨우 그정도 가십거리였다. 그런 척박한 세계 속에서 나는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발령 난 곳은 그다지 주목 받고 있는 부서는 아니었다. 사실 그런 부서가 있는지도 몰랐다. 입사한지 오래되지 않았기도 했지만 ‘제약기록내외입출입관리부’ 라는 한번 들어서는 대체 무슨 업무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 부서명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만한 인상을 주는 게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자리에 있던 몇안되는 사무용품과 개인 소지품을 챙겨 터덜터덜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가면서 나는 지독한 외로움의 응어리 같은 것을 느꼈다. 나름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뎠다는 충만감과 자부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왔건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아마도 세월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많이 젊었던 나는 그게 또 이상해서 괜스레 짜증이 났고, 일부러 발소리를 탁탁 내가며 계단을 내려갔다. 하필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날 것은 뭐이며 하필 옮기게 된 사무실은 원래 있던 곳보다 아래층인건지. 힘은 덜 들었지만 좌천당하는 느낌이었다.


소모적인 감정에너지까지 써가며 새로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겨우 이정도의 운동량으로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던 걸로 기억한다. 항상은 아니었지만 운동은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고 종종 연락이 오면 축구나 배드민턴 같은 스포츠 활동도 임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입사 이후로 운동이라고 부를 만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남의 일처럼 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그런 스스로의 반응에 황당해졌다.


그때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곳엔 나보다 좀 더 많은 짐을 상자에 넣고서 그걸 힘겹게 들어 올린 모양새로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앞머리가 흘러내린 땀 때문에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지만 상대방은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보였다. 심하게 헥헥거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방금전까지 운동량 부족으로 살짝이나마 고민에 빠질 뻔한 내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밌다고 생각했다. 이미 여기는 사무실이었다. 도착지였다는 소리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저기..그 상자 내려놓으시면 좀 덜 힘드실 것 같은데.."

"네? 아.."


그 날, 그 시간을 기점으로 나와 그녀는 같은 부서 동료가 되었고, 약 3년을 같이 일했다. 물론 훗날의 일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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