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치호 교복을 입은 아이한테 접근했다가 치호와 만나고 만 창준.
쿵— 하는 큰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뭐야?”
커다란 물통을 바닥에 떨어트린 이치호가 그곳에 서 있었다.
이건 계산하지 못한 일이다.
아니 계산할 수 있는 일인가?
이치호는 꽤나 황당한 표정으로 나와 붕대녀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을 파악해보려는 시도로 보였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이치호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의 한쪽 눈가를 다 뒤덮고 있던 거즈는 얇고 작아져 눈가 아래에 안착해있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예요?”
붕대가 말했다.
“아, 뭐. 그런셈인가..?”
굳이 말하자면 아는 척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금 내 추측으로 보자면 이 두사람은 가해자와 피해자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착각이란걸 확실히 알겠다.
이치호의 태도는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붕대녀석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도리어 붕대녀석은 시종일관 이치호를 견제하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착각이란걸 확실히 알겠다.
“무슨 용건으로 온건데.”
이치호는 붕대녀석은 본체도 안하고 내게 거듭 물었다.
“아..그게..”
“너는 어른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오히려 붕대녀석이 내 편을 들어주는 모습이었다.
“지훈아.”
붕대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껏 낮았다. 그 울림에 붕대녀석도 흠칫 한다.
“자리 좀 비켜줄래?”
“싫은데.”
오호. 붕대녀석의 반격. 지지 않겠다는 일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너랑 내가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었던가?”
“그건 아니지만 나도 이 아저씨랑 아는 사인데. 왜 자리를 떠야 하는지 모르겠네. 내 맘이고.”
“....”
고오오오오. 어디선가 엄숙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지금 자리 선정을 잘못한 건 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할머니한테 전화 드려도 된다는 말로 들린다?”
“야!”
“어엇.”
이치호가 한 마디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붕대녀석이 이치호의 멱살을 잡아챘다. 다른 한 손으로 잔뜩 힘을 준 주먹이 얼굴을 향하기 직전에 내가 막았다.
두 사람의 어깨를 떨어뜨리는 동시에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부웅 하는 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이게 뭐하는 거야. 네 녀석들.”
뭐 이런 꼰대같은 발언을 하고 싶은건 아니었지만 눈 앞에서 주먹다짐을 시전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대행이 잔뜩 화가 난 어른의 목소리는 제법 효과적이다. 게다가 이곳은 학교였다. 순간 열이 올랐던 붕대녀석이 정신을 차린 듯 씩씩거렸다.
“너 한 번만 더 할머니 들먹이면 죽여버릴거야.”
“할 수 있으면 해보시던지.”
할 수만 있다면 이치호의 입을 틀어막는게 현 상황에서 가장 좋은 행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붕대녀석이 억울하고 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편을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측은지심이 절로 드는 상황임은 분명했다.
그때 이치호가 붕대녀석 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어엇. 그러다 또 맞을까 걱정인 나와 달리 이치호는 여유롭게 그 앞에 섰다. 붕대녀석도 이치호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반걸음 뒷걸음쳤다.
“지훈아. 뭐가 걱정이야.”
그는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 할머니한테 이쁨 받는다고, 손주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나로써는 아쉬운 일이지만.”
“아오씨.”
“손, 다 나았어?”
걱정하듯 묻는 말에 붕대녀석의 얼굴이 울그락풀그락해졌다. 저 녀석은 이치호를 진심으로 싫어한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왜..?
붕대녀석은 결국 두 주먹이 하얘질 정도로 꽉 쥐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떴다. 형형한 눈동자가 끝까지 이치호를 향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나른하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너 괜찮냐.”
“응. 안 괜찮아보여?”
“아니, 예의상 물어본거긴 하다만.”
“진짜로 여기까지는 왜 온거야?”
“아니 나는 네가..”
나는 입을 흡 하고 다물었다. 내 생각이 하나부터 열까지 착각이었단 사실을 말하려니.. 조금 꺼려졌다.
이치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가끔 보면 얘는 눈도 깜빡이지 않는 것 같다.
“혹시나 왕따라도 당하는 건..아닐까 걱정돼서.”
“..허?”
이치호의 눈에 힘이 풀렸다. 황당해하는 입꼬리는 갈길을 찾지 못하고 묘하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되는 소리..”
“응. 와서 보니까 그러네. 하하.”
“..완전 이상해.”
“그런가?”
그때 종이 울렸다. 종소리가 울리자 교문에서 달려오는 학생들과 건물 안에서 우르르 움직이는 무리의 이동이 눈에 들어왔다.
“가봐야겠지?”
그러고보니 USB도 줘야하는데..차에 있었다.
지금이라도 가지고 와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
이치호가 내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별로 저항할 마음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힘이 세서, 어어 하는 사이 건물 모퉁이 옆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나를 더 구석에 밀고 이치호가 잠복하는 형사처럼 고개만 살짝 내밀고 바깥을 살폈다.
“혜경..”
혜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같이 쳐다보는 것까지는 계산하지 못한 듯 이치호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너, 알고 있었어?”
그 물음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담담하게 마주하는 눈빛.
‘뭔가.. 쎄한 기운이 있다고 해야하나.’
‘소름끼치는 새끼.’
유진의 떨떠름한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김지훈이라 불리던 붕대녀석의 무력하고 분해하는 얼굴도.
‘신창준씨.’
나를 처음 본 날 그가 했던 건조하고 차가웠던 목소리.
“너 뭐냐..?”
내 얼굴은 지금 어떤 표정일까. 어떻길래 이치호는 저렇게 쓸쓸하게 비소하는지.
오후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