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상과 달력 뒷면

by SIEMPRE

아버지 사후 우리가족에게 남은 건 외갓댁 밖에 없었다. 그러니 명절은 반가우면서도 소외감을 경험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우리 남매를 각별하게 생각하셨지만, 그래도 유교 관념 상 외손자는 외손자로 대할 수 밖에 없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외갓댁에서 치러지는 제사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외갓댁은 불교를 믿고 절에 다니지만, 유교적인 제사도 지내고 조상을 모시면서 민간 신앙에 따라 종종 굿도 한다. 그야말로 한국적인 가족이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굿에 너무 비싼 돈을 들인다며 한탄하곤 했다.


그러니 기독교 가정인 우리 집만 유독 거기서 돌출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실상 자발적으로 제사에서의 배제를 택한 셈이다. 제사가 치러지는 동안 그 집에 가지 않고 거리를 두다가 오후 쯤에나 찾아가는 식이었다. 어쩌면 그 덕분에 이런 한국적인 신앙 체계를 일종의 타자의 관점에서 지켜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교회에선 제사 지낸 음식을 먹지 말라고 가르쳤다. 사실 제삿밥은 딱히 먹고 싶지도 않았다. 고깃집을 하는 외할머니댁에서 제삿밥보다 맛있는 음식이야 항상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제삿밥은 삶은 문어의 냄새와 오래 끓인 탕국 냄새가 뒤섞여 나는 그 생소한 냄새가 싫었다.


기이하게도 제삿밥은 마음에 안들고 싫은 수준을 넘어서 불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치 이슬람 신자들이 돼지고기를 금지된 음식, '하람'이라고 부르며 멀리하는 것처럼 왠지 입에 담아선 안 될 부정한 음식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외갓댁에서도 그런 이질적인 정서를 너무 정당한 것인양 드러내는 우리 가족에게 나름의 심리적 양보를 많이 한 셈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제삿밥을 거부하면서도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었다.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될까? 벌을 받나? 지옥에 가나? 겨우 그거 갖고 지옥에 갈 것 같진 않은데, 그 중간 단계의 벌이 뭐가 될지 명확한 답은 없었다. 다만 당시에 그렇게까지 디테일한 고민은 없었고. 그저 불경하게 느껴져서 손을 못대는 정도였던 것 같다.


일종의 타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흥미를 끄는 건 창문을 가리는 달력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날짜가 지난 달력을 뜯어서 창문과 틈새를 몽땅 하얗게 가리셨다. 아마 그게 외할아버지가 찾을 수 있는 가장 하얀 것, 정결한 것이었던 것 같다. 사악한 기운이 날짜 지난 달력의 새하얀 뒷면에 가로 막혀 정결한 제사공간에 못들어올거라고 생각하신걸까?


벽면은 그렇게 맨들맨들한 질감의 달력 뒷면으로 하얗게 도배되고, 목재 제삿상엔 평소에 맡아보지 못한 묘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이 늘어선다. 그 냄새는 타오르는 향내와 뒤섞여서 어딘가 '세속적이지 않은' 향을 만들어낸다. 그게 타자의 관점에서 본 제삿날의 풍경이다.


제사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그 하얀 달력에 기름때와 향냄새가 배긴다. 그렇게 날짜가 지난 달력은 제 역할을 알뜰하게 해내고 버려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외갓댁은 엄마의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남매에게도 엄마 말만 듣지말고 부처님도 좀 믿으면서 제사음식도 먹고 하라고 일종의 역전도를 시도했을 정도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기독교 하나에만 올인하는 게 좀 위태롭게 느껴졌던 나는 내심 엄마 몰래 부처님도 조금씩 믿는 게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하긴 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했단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땐 꽤나 놀랐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한 내세관을 가진 기독교가 더 와닿을 수 밖에 없었나보다. 엄마의 전도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만한 집념은 존경할 만 하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 사후 엄마에게 전도 당해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지나간 시간을 회고하면서 마지막 순간에 하늘에 열정을 바치는 심정으로 성경을 필사하셨다. 어쩌면 스스로 생각하셨을 과거의 잘못들, 부끄러움들을 털어내고 좀 더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하늘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지 모른다. 할아버지 특유의 그 날카롭게 질러대는 듯한 필체가 있다. 검은 사인펜과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쓴 요한복음의 구절들이 남았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기묘하다. 외할아버지가 느끼기에 가장 밝고 깨끗한 것이 여전히 달력이었나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 구절을 필사하는 데 이용된 종이는 공책이나 메모지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잘게 잘라낸 달력 뒷면이었다. 외할아버지 사후 유품으로 건내받은 성경책에 그리도 잔뜩 남았다. 하얗고 맨들거리는 종이에 쓰여진 날카로운 필체의 요한복음 구절들.


그냥 노트를 새로 살 수 있었을 텐데 달력을 사용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 지나간 시간을 되새겨보고 그 시간을 일종의 정결한 의미로 재생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달력의 앞면이 세속의 시간이라면, 그 뒷면은 탈세속을 위해 주어진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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