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은 어디로

무심코 건넨 말들은 어디로 가나요

by 소윤
그때 내가 한 말은 어느 순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지 모른다. 나의 말도 어떤 벽에 액자로 걸려 오랫동안 오후의 햇살 아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박솔뫼 <사랑하는 개> 중


나는 이 문장으로부터 액자의 구체적인 모양을 상상해본다. 액자 프레임은 어떤 색일까? 액자 안에 들어있는건 그림일까 사진일까, 무엇을 담은 풍경일까, 혹은 어떤 사람들 담았을까. 그이의 표정은 어떨까.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상상을 더 뻗어나가 나는 그 액자가 있는 '말들의 방'을 떠올릴 수도 있다. 액자 하나가 달랑 달린 회색 콘크리트 벽은 어떤 누구의 말이었으며, 그 말로써 이 벽을 어떻게 세우게 되었는가. 조도는 낮지만 창문이 넓고 채광이 좋은 방. 햇빛을 타고 벽에 새겨진 창문의 격자무늬는 누구의 감옥이 될까? 내가 언젠가 들었던 말은 그 방의 무엇이 될 수 있지? 회색 암막커튼, 혹은 침대. 얼마 전 들은 말을 생각해보면, 그 말은 구겨진 백지를 다시 쫙쫙 펴서 액자에 넣고 콘크리트 벽에 매달아놓은, 그런 풍경이 된다. 나의 말이 어딘가로 흘러가 누군가의 방이 된다면, 어쩐지 황홀하면서도 조금 두려운 기분.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은 향초나 터그, 혹은 이불 같은 것이면 좋겠는데.

역으로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 내 손에 닿는 것들이 과연 어떤 말이었을지 연원을 거슬러 가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내가 매일 덮고 자는 꽃무늬 극세사 이불. 나는 이 이불이 부끄럽지만 동시에 내가 가진 물건 중 제일 따뜻해. 이런 촌스러운 다감함은 어디서 받았던 걸까 되짚어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펜은... 내가 좋아하는 시의 제목이 떠오른다. '펜은 심장의 지진계' 나는 밤마다 나의 여진을 기록하고 진원을 찾으려 한다. 당신은 나와 매일 밤 흔들리는 땅을 공유하는 사람이 된다. 이 흔들림에 동참해주어서 고마워.

말이라는 건 그물과 같아서 물고기는 낚을 수 있지만 바다는 건져올릴 수 없다. 예컨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내 사랑을 사랑에 가두는 감옥이 된다. 나는 분명 사랑을 상회하는 감정을 느끼는데 그걸 표현할 말은 어디 있지? 내 사랑이 사랑에 갇히는 게 싫다. 마찬가지로 미움도, 증오도, 연민도, 그 안에 갇히는 게 싫다. '안녕'이라는 말보다는 다른 인사법을 찾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에서 나는 온 몸이 투명해져 그 사림의 눈빛이 나를 구석구석 투과했으면 좋겠다. 그래야지만 증명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가끔은 이누이트 족이 되고 싶었지.
눈(雪)을 표현하는 말이 수십, 수백가지가 넘는다는.
그렇다면 나의 말도 북극의 눈이 되어 오랫동안 이누이트의 발 밑에 쌓이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사이에 남겨진 말들이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쓰지 않는 그것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줄 아는 너를,
너를
당장에 찾아가려 했어
그렇지만 잠깐 멈춰서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
달려가고 있다, 너에게

김이강 <마르고 파란>


너와 함께 낯선 곳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싶다고
말한다면 전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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