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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되어가는 슬픔

축, 생일

by 소윤

한 편의 시로 시작하기로 하자. 시작이 아니라 시도해보기로 하자. 어쩐지 이 글을 시작하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도. 그저 시도만 하다 말 것 같다. 그러나 문장이 내가 생각치 못한 곳으로 나를 이끌어주리라 믿는다. 믿기 위해서, 조금 더 단정하고 아름다운 구절들의 몸을 잠시 빌려 이야기 해보는 것이다.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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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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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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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신해욱, <축,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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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14일에는 물류센터에서 하루 종일 택배 상자를 포장했다. 올해 5월 14일에는 면접을 세 군데 보러 갈 예정이다. 매년 이런 생일을 보내는게 의도한 계획은 아니었지만 사실 나는 매년 이 날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늘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좀 더 편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5월 14일만 되면 언제나 마음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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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생일>은 신해욱의 두번째 시집 <생물성>에 처음으로 수록된 시다. 생일의 시작에는 늘 이 시를 읽는다. 원래 교과서나 문제집을 제외하고는 책에 절대 밑줄을 치지 않는데 딱 한 군데, 이 시집의, 이 시의, 이 한 구절에는 연필로 아주 연하게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가 나와 어색하다는 게 가능한 감정일까? 그러나 유독 생일이 되면 나는 나와 어색해진다. 아니, 원래 좀 어색한 사이였는데, 겨울이 끝나고 드는 따뜻한 볕과 좋은 향, 무구한 초록에 취해 짧은 봄밤 정담을 나누다가 봄밤이 끝나고 다시 어색해지면서, 나와 나는 원래 그렇게 어색한 사이였다는 걸, 매년 생일마다 확인하는 기분이 든다. 확인할 때마다 나는 나랑 더 어색해진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 잘 모르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전혀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편하다. 그러면 나는 나와 여전히 어색하지만 어색한 사이인 것을 확인받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아무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면, 아무도 내가 나인 줄 모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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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생일>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 중에서 나의 생일 기분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나를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내가 갑자기 내가 되려 할때의 장력, 긴장감. 나는 이 시를 거의 눈으로 짓누르듯이 읽는다. 모든 시가 그렇듯 아주 공들인 하다 만 말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태어난 날마다 시를 읽는 게 아닐까? 공들여서 하다 만 말, 공들여서 내가 되려다 말아버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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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어색하고 이물스러운 것과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잖아. 내가 나라는 것만으로 축복받는 날이라니 이상해. 사실 나는 여기에는 없는 기분이잖아. 여기보다 어딘가에 더 있을 것만 같잖아. 그런데 생일이 되면 여기에 내가 있다는 걸 아주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다. 그 하루가 나를 나에게 딱 고정시켜버린다. 태어난 것을 축하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어디선가 태어나는 중일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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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발이 늘 땅에 떨어져 있는 사람 같아. 한 3cm 정도. 증오하고 좋아하던 언니가 내게 말했을때 나는 그 언니로부터 내 깊은 부분을 들켜 순간적으로 마음이 무방비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사실은 내가 그렇게 보이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을 딛지 않고, 생일이 없고, 태어나지 않았는데 있는 사람. 누군가 나를 그렇게 봐주고 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언젠가 내가 나 자신을 진짜로 버려야 하는 날이 올때 홀가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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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케이크 위의 촛불이 하나씩 더 늘어갈수록 나는 너무 내가 되어간다. 관성처럼 내가 되어간다. 결국 나라는 구심점으로 내가 모여서 자꾸만 내가 된다. 그런데 나는 나를 정리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그게 너무 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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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생일은 내가 나로 되어간다는 것을 확인하고 축복받는 동시에 내가 나인 게 조금 어색해지고 지루해지기도 하다가 그래도 어딘가에 조금 더 나인 내가 있을 것 같고 의구심이 들고 축하를 받으면서 웃다가도 시시각각 생경해지고 갓 태어난 애처럼 계속 울고 싶다가 울음을 그치는 법을 잘 배웠다고 살면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니까 돌잔치때 찍힌 사진 속 나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되어가는 거겠지 우는 대신 웃거나 춤추거나 무언가를 산다 그런 사람이 된 날을 그런 사람이 된 나를 축하하는 것 같아서 조금 울고싶지만 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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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지나면 한살 더 먹고 나는 조금 더 나에 가까워진다.
가장 울고 싶은 지점은 내가 나에게 가까워지기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 인 것 같다. 그 거리가.
내가 되어가는 슬픔, 나는 언제까지나 그것때문에 어떤 봄날마다 조금 울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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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시작해보기로 하자. 시작이 아니라 시도해보기로 하자. 어쩐지 나는 나를 시작하지 못할 것 같다. 죽는 순간까지도 시작하지 못할 것 같다. 그저 시도만 하다가 말 것 같다. 나는 내가 되어가기만 한다. 내게 가까워지기만 할 뿐이라, 정리하지 못한 내가 너무 많으니까. 내가 갑자기 내가 되려 할때 놀라 울지 않기 위해서 조금 더 흐릿하고 아득한 얼굴을 잠시 빌려서 말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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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있을 조금 더의 내가, 여기 있는 조금 모자라는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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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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