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착길 Dec 31. 2021

코끝 찡한 밤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 같아."


회사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고 들어와서 갑자기 전쟁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아이들의 시끄러움에 입을 닫더니 삶은 달걀 두 개와 무 김치를 입 속에 마구 넣는다. 우적우적 씹어 먹고는 어느새 소파에 길게 누워 버린다. 자기방 침대보다 넓은 거실에서 자려던 딸이 아빠를 방으로 가게 해달라고 해깨웠지만 알았다고 하면서 더 깊이 잠이 든다.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에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든다. 제야 스탠드를 켜고 이어폰을 끼고 앉는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나온 '9와 숫자들'새 앨범 <토털리 블루>를 재생한다. 전쟁터 있다가 돌아온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베이스를 깔아준다.  앨범의 잔잔한 멜로디와 부드러운 음색이 모두의 우울을 직설적으로 위로한다. 쓰러진 마음을 툭툭 토닥인다. 쓰러져 정신을 잃은 상태에선 어떤 음악도 들리지 않을 테지만, 삶에 지친 이들에게 들어보라 권하고 싶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한낮에 발매한 어떤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어떤 전쟁을 치르고 왔을까. 내일이면 알게 될 테지만 앉은 김에 헤아려 본다. 홀로 전쟁터에 있다가 돌아온 가장을 이렇게라도 생각해줘야 할 것 같다. 최근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을 시점, 그 무렵 인사이동이 있었다. 새 발령지로 옮기기 전부터 기운이 없더니 옮기고 나서는 더 지쳐 보였다. 갑자기 어머니 건강이 안 좋은 때라서 마음도 안 좋았을 것이다. 나보다 더 마음이 아프고 슬펐겠지. 그래서 새로운 업무가 더 버거웠겠지. 귀여운 악동들과 집에서 치르는 전쟁에 비할 수 없겠지.


밥벌이를 위해 자신을 잃고 점점 더 사회화될 수밖에 없는 남편에 반해 자신으로 살고 싶어 점점 더 개성화되고 있는 나. 어느 시점엔 나도 사회 속에서 밥벌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에서도 밖을 잘 살펴야 한다. 밖에서 무슨 일로 괴로운지 들어두어야 한다. 자신을 잃지 않고서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비책을 찾아두어야 한다. 일단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들어온 음악에 몸을 맡긴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햇살에 눈이 부실 때까지 누워 있었다. 방학이니까. 늦은 밤까지 음악을 듣다가 잠들었더니 눈이 떠지질 않는다. 모두가 방학을 만끽하는 듯 뒹굴거린다. 다행히 아침밥을 재촉하는 이가 없다. 이 나른함, 주말과는 다른 여유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간밤의 음악이 몸에 들어와 출렁거린다. 이런저런 노래들에 관해 말하고 싶어 진다. 아직 비몽사몽인 남편은 끄덕끄덕 들어주다가 다시 코를 곤다. 늦은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기 전, 이승윤의 앨범 <폐허가 된다 해도>를 재생한다. 요즘 나의 노동요. 크리스마스를 고대하기 시작하는, 크리스마스이브 한 달 전에 발매한 어떤 이유가 느껴진다. 그 덕분에 고단한 12월을 버틸 수 있었다. 나에게도 선물이 되었다.


지난밤엔 9와 숫자들의 <토털리 블루>로 마음을 토닥이고 오늘은 이승윤의 <폐허가 된다 해도>로 몸을 움직인다. 두 앨범을 연달아 들으니 마음이 단단해지고 몸이 꿈틀거린다. 지쳐 쓰러져도 일어나 움직일 힘이 생긴 듯하다. 오늘도 코 고는 소리가 베이스를 깔아준다. 세상에 하나뿐인 음악이다. 코끝 찡했던 지난밤이 아득해진다.





작가님들께서도 올 한 해 안팎으로 전쟁을 치르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함께 겪는 전쟁도 있지만 홀로 견뎌야 하는 전쟁도 있잖아요.  집에 살면서도 다른 세상에 사는 듯 남편의 전쟁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밖에 없답니다. 다 알지는 못해도 힘들었겠구나, 끄덕이던 순간이었어요. 겪지 않은 전쟁을 어렴풋이 공감하며 음악으로 위로한 밤. 해의 끝까지 음악은 위로와 희망을 선물로 줍니다. 음악과 함께 2021년을 위로하고 2022년을 희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가의 이전글 방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